이산가족

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2016-01-24     박경희 <수필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추석과 설은 최대의 명절이다. 고향을 찾는 사람의 숫자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으로 그 규모를 설명한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자기의 뿌리이며 혈육·가족이 있는 근거지이다. 타향살이의 서러움은 고향이 있기에 가지는 정서다.

그런데 이 민족적인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은 갈 처지가 되지 못해 못 가는 사람들이다. 지금 자기의 형편으로는 가족과 친척, 동네 사람들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직업 때문에 못 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가 어떠하든 고향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고향에 갈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고향에 못 가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을 북한에 두고 온 사람들이다. 승용차로 아침에 떠나면 저녁에 도착할 수 있는데도 그 고향에 가지 못한다. 그래서 남북분단은 이산가족에게 언제나 가슴 아픈 현실이다.

쉽게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고향은 있지만 갈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철이 들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아름다운 고향산천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사실은 갈 수도 있는데 못 가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몇 년 전 82세의 한 실향민이 임진각에서 ‘이산가족상봉신청 접수증’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대부분 70이 넘은 노인들이 눈을 감기 전에 혈육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한 인간적 바람이 이뤄지는 날은 언제쯤일까.

인민군 1비행사단의 책임비행사였던 이웅평 상위(대위)는 1983년 2월 25일 소련제 미그 19기로 평남개천 비행장을 이륙한 후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었으며 우리 공군 F-4의 유도로 수원비행장에 착륙, 귀순했다. 귀순 후 이웅평은 한국공군에 입대했으며 대령으로 공군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2002년 5월 4일 별세했다. 한국으로 귀순한 후 그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루는 서해바닷가에 나가서 휴식하고 있던 중 파도에 떠밀려온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그건 남쪽의 라면 봉지였는데 뒤쪽을 읽어보니 라면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계란을 풀어 넣는 게 좋다는 글귀가 있었다. 그건 남쪽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달걀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때 나는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남쪽가족이 준비해간 음식 중 ‘구운 김’을 집어들고 이게 뭐냐고 묻는 북쪽가족이 있었다. 달걀과 김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현실’인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耳不如一見)’이라는 글귀가 있다. 특별히 잘 차려입고 가지 않아도 북쪽 사람들에게 남쪽식구들은 잘 먹고 잘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잘 차려입고 나온 그들이 촌스럽고 부자연스러워 보일 뿐이다. 남쪽에서 간 가족들은 할 수만 있다면 겉옷 뿐 아리라 속옷까지도 다 벗어주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감시가 심해도 북쪽에서 귀하다는 달러를 혈육의 손에 쥐여 주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가족과의 짧은 만남과 가슴 아픈 헤어짐은 남쪽사람이나 북쪽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내일 모레면 세상을 떠날 노인들이 눈을 감기 전에 혈육의 손을 단 한 번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하는 피눈물 나는 그 소원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이산가족 상봉문제는 정부가 아무리 강경한 태도로 나가도 그것을 반대할 국민은 하나도 없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하는 800만 실향민은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다. 북한은 체제의 이름이지만 북녘땅은 고향산천의 이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