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2013-03-11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자신이 태어난 곳이든, 부모께서 나신 곳이든, 조상 대대로 뼈를 묻은 곳이든, 누구에게나 고향(故鄕)은 있다.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 품과 같은 곳이 바로 고향(故鄕)이다. 타향살이의 고단함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며, 의미를 상실한 삶에 원초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향 생각이 간절한 사람이 타지에서 뜻밖에 고향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반가운 일도 드물 것이다. 더구나 고향에서 막 떠나온 사람이라면, 그 반가움이 배가되는데, 고향의 사정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지를 떠돌던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가 어느 날 문득 고향 사람을 만나 고향을 물었다.

◈ 잡시(雜詩)

君自故鄕來(군자고향내) 그대 고향에서 왔으니

應知故鄕事(응지고향사) 응당 고향의 일 아리라

來日綺前(내일기창전) 오시던 날 비단 창문 앞

寒梅著花未(한매착화미) 겨울 매화 나무에 꽃이 피었던지요?

 

※ 시인은 고향(故鄕)을 떠난 지 오래다. 세파(世波)에 휩쓸려 살다보니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잊을 수도 잊혀 지지도 않는 게 고향(故鄕) 아니던가? 길을 걷다가인지 주막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고향 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고향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만나자, 그간 잊고 지냈던 고향 생각이 불현듯 간절해진다. 이인칭 존칭 대명사인 군(君)으로 부를 만큼 그 고향 사람은 소중하다. 그 이유는 그 분으로부터 고향 소식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고향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몹시 흥분되었을 터이지만, 시인은 의외로 담담하다. 온갖 것들이 다 궁금할 터인데도 시인이 물은 것은 달랑 한 가지이다. 그것도 가족의 안부가 아니다. 궁금증이 돋은 사람에게는 한가하다고 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고향을 떠나오던 날(來日)을 언급한 것은 시인이 가장 최근의 소식을 접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인이 가장 궁금한 최근의 고향 소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매화였다. 비단 무늬 새겨진 창문(綺窓) 앞에 서 있던 매화나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하고 많은 것 중에 매화이며, 매화 중에도 비단 창문(綺窓) 앞에 있는 매화일까 아직 잔설(殘雪)이 남아 있을 때 피는 것이 한매(寒梅)이지만, 이 매화가 피었다는 것은 봄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고향에도 봄이 왔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비단 창문(綺窓) 앞의 매화일까? 기창(綺窓)은 비단 무늬를 아로새긴 창문으로, 보통은 여인네들이 기거하는 방에 달려 있는 창문이다. 그렇다. 비단 창문이 달린 방의 주인은 바로 시인의 아내였던 것이다. 시인의 아내는 비단 창문 앞 매화가 꽃 필 때를 손꼽아 기다렸다. 왜냐하면 봄이 오면 타지를 떠도는 남편이 돌아올 것 같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시인은 거꾸로 비단 창문 앞 매화꽃이 피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의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고향이 그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그리움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비단 창문 앞 매화와 같은 운치(韻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