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령을 바라보며

기고

2012-12-05     오성복 <충북숲해설가협회 괴산지회장>

오성복 <충북숲해설가협회 괴산지회장>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를 연결하는 도계인 백두대간을 잇는 이화령 복원사업이 6개월여 만에 완공·개통됐다.

준공식장에서 바라본 이화령의 산줄기는 장엄한 기운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끊어버린 실수를 87년 만에야 되돌린 것이다.

이화령은 이유릿재, 이화현(伊火峴)으로도 불리며 이화령(梨花嶺)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화령 부근에 돌배나무가 많아 봄이면 배꽃이 하얗게 피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시간이면 이화령길 아래 큰 돌배나무까지 선착순 달리기를 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화령을 주요 통로로 경상도를 드나들던 충북과 국민들에겐 이 고개는 삶의 애환이 가득하다.

내가 태어난 곳도 이화령 바로 아랫마을이다.

물론 전쟁중에 태어났고 대여섯 살 때 이승만대통령이 오셔서 이화령 확장공사를 한다고 시끄러웠고, 아버지께서도 구경삼아 다녀오시면서, 연막탄 통과 통조림 깡통을 연장통으로 쓰신다고 주워 오셨던 걸 기억한다.

초등학교시절엔 공병대가 확장공사를 하면서 다이나마이트를 터트릴때면 100여m씩 돌이 날아와 길이나 논바닥에 박히는 것을 보며 등·하교길에도 군인들의 통제에 따라 길을 다니곤했다.

내가 5학년 때였다. 확장을 했어도 좁은 자갈길에 버스가 수 십 미터를 굴러 친구의 아버지를 포함해 수 십 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 사고가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친구의 닭똥 같은 눈물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런 큰 사고들은 잊을 만하면 되풀이 되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개가 바로 이화령 고개였다. 이후 87년이 지난 지금 복원된 이화령에 복원이라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나는 좀 다른 방면에서 그 의미를 찾고 싶다.

우리민족은 산에 대한 생각이 남다른 것 같다. 특히 산줄기는 땅의 기운을 전달 받는 통로로 아주 중요시 여김을 넘어 신앙처럼 생각해왔다.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의 이화령은 태백산, 소백산, 조령산을 거쳐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까지 남으로 흘려 보내야하는 대동맥의 허리에 있다. 대간에서는 다시 13정맥을 통하여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실핏줄처럼 그 기운이 연결되지 않은 곳이 없다.

산줄기는 마치 우리 몸의 동맥 핏줄 같아서 원활한 흐름이 멈추거나 훼손되면 그런 고통은 고스란히 우리민족의 상처로 남을 뿐이다.

1925년 일제강점기 때 영남과 서울을 잇는 신작로는 그때의 기술로 어쩔 수 없이 산줄기를 잘라야했지만 이화령이 잘림으로 대간으로 전달되어야할 기운이 끊겼다.

이로 인해 영,호남이 등을 맞대고 반목과 갈등을 겪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복원된 이화령구간의 산줄기를 걸어본 사람은 발밑으로 느끼는 그 활기차고 장엄한 기운의 흐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산을 좋아하고 산에 기대어 사는 한 남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보기 위해 조령산에서 백화산 구간을 종주를 해 보았다.

초겨울의 짧은 해에 6시간여를 걷는 동안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 걷는 내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보이는 모든 산들이 어제의 그 산이 아니고, 지난날의 그 산하가 아닌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느낌은 나만이 느끼는 감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길들은 산 아래로 시원스레 달리며 새로운 한반도의 시대는 복원된 산줄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기운은 우리 민족의 번영과 대한민국의 융성한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을, 찬바람이 불어 넘는 이화령 고갯마루에서 가슴벅차오는 생각에 잠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