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낮은 자의 목소리 - 지옥으로 가는 길

2006-08-01     충청타임즈
우리 불자는 삼보에 귀의하여 계로 스승을 삼고 부처님의 미소 앞에서 한없는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고 서원하며 6바라밀이 가르치는 인욕으로 정진하여 백인천인(白忍千忍)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주변은 어떠한가.

신문과 TV에서 연일 보도되고 있는 흉악범죄, 공해문제, 지독한 교통체증.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사회에서 본의 아니게 부닥치는 여러가지 일로 인해 우리의 언성은 높아지고 자칫 신앙인의 자세를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분노는 한 번 격화되면 제동없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마차 바퀴와도 같아서 사람이 한 번 이것의 지배를 받게 되면 자율적 인격은 상실되고 육체란 껍질만 쓰고 있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들 마음 가운데 성내는 마음이 한 번 싹터서 그것이 차차 자라 우리의 마음 전체를 점령해 버려 다른 생각을 다시 할 여유가 없을 때 우리 마음에 지옥세계가 나타나게 된다.

이 성냄이 인간의 번뇌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많은 번뇌가 있지만, 세상의 온갖 것을 파괴하고 가장 인생을 허무하고 힘들게 만드는 근본이 바로 성내는 것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상에서 다시 없다.

성냄은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 불쾌감을 내는데서 비롯된다.

남이 나의 속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시끄럽고 복잡한 길을 걸을 때도 급히 어디를 가는데 어느 물건이 방해가 되어 짜증나고 기분이 나빠진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던 것이 차차 자라서 커지고 성냄이 자기의 온 마음을 점령했을 때 그만 주위가 다 적이 되고 만다.

우리들은 다함께 살아가야 할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본성품을 망각하고 일체를 적으로 삼는 그 마음이 바로 지옥이다.

어느 날 젊은 무사가 선지식으로 알려진 스님을 찾아가 지옥의 유무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스님께서는 "보아하니 그대는 훌륭한 무사 같은데 지옥의 유무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한심하네. 자네야말로 땡땡이 무사일세"라고 힐난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참고 있었던 무사가 계속되는 모욕에 드디어는 칼을 뽑았다.

스님은 이리저리 도망 다녔지만 무사는 결국 스님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칼로 내리치려 하였다.

그때 "이봐 거기가 바로 지옥일세."

스님의 호령에 무사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듯 섬뜩했다.

순간적인 분노로 유명한 스님을 죽이게 되면 자기나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노야말로 바로 지옥인 것을 깨달은 무사는 칼을 내던지고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자 동시에 이제까지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봄바람 같이 따사로운 스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 곳이 극락이라네."

스님은 지옥과 극락을 난해한 언어로 설명하신 것이 아니고 아주 간결하면서도 가슴에 아로새기는 실증으로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법구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에도 "성냄을 버려라, 거만을 버려라, 모든 애욕과 탐심을 버려라. 정신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고요하고 편안해 괴로움이 없다"라고 이르셨다.

화를 내면 화탕지옥이고 활활 터오르는 가슴의 불길은 나를 태우고 상대도 태우고 세계를 태운다. 물론 살아 있는 한 번뇌가 있기에 인간에게는 화가 나는 법이다. 그것이 없으면 도리어 사회의 부정을 바로 잡을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 묘한 모순도 가지고 있다.

자기의 잘못을 탓하고 화를 내는데서 분발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만,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분노에 대해서 우리는 부처님 말씀대로 인욕과 바라밀을 늘 실행해 지옥계를 벗어날 수 있는 현명한 삶을 살아야겠다.

참고 견디는 마음이 있으면 분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은 우리들은 미륵반가상의 사유상을 마음 가득히 담아두어 한 번 더 참고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를 수용하고 포용하고 이해하는 몸과 마음을 잘 가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