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42>

딸깍 딸깍~ 질퍽한 인생사 밟고 가누나

2006-07-06     충청타임즈

중국에선 '극' 한국에선 '목혜'라 불려

 


나막신은 통나무를 발모양으로 만들어 바닥을 파내고 신발 밑부분에 굽을 만들어 이굽에는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쇠편을 달았다. 나막신을 만드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기 때문에 한집에 두 세 켤레 비치하면 가족들이 함께 사용했다. 발이 크면 신발에 맞지 않아 신을 수 없지만 작은 발의 아이들까지 질질 끌고 다니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요즘은 사려고 해도 특별히 주문하거나 시골의 5일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물품이 됐다.

나막신 세대의 고무신은 최고급 신발의 대접을 받았는데, 나막신은 우리나라의 특징적인 신발로, 나무를 길다란 쪽배 모양으로 속을 파내고 발이 들어갈수 있도록 여자고무신 모양으로 만들었다.

바닥에는 교각을 세우듯이 두개의 발을 높이 붙여 빗물이 흘러도 나막신 위로 빗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고안했다.

나막신은 굽이 높아 빗물만 피한 것이 아니라 오래신도록 고안된 신발이지만, 맨발로 신으면 발이 닿는 부위가 벗겨져 피가 나고 상처를 입기 때문에 꼭 버선을 신고 나막신을 신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나막신은 형태가 다양해 코가 높고 굽을 달지 않은 것은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신던 고무신과 같은 것과, 남자들만 신던 볼이 넓은 것, 젊은이들은 힘이 좋아 두텁고 튼튼한 것을 신었다. 나막신은 이름도 무자, 목리, 목극, 목혜, 나막재, 나모께, 나무신, 꺽뚜기 등 명칭도 다양하다. 나막신은 원래 중국의 후한시대에 나막신(극)이 유행했고,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선조 경자년(1600년)에 처음 목혜가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남쪽으로 들어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처음에는 '고지평리'또는 '금기평판'이라고 해서 타원형의 나무판자에 끈을 달아 신다가 후에 오늘날까지 볼수 있는 나막신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게다'라고 해서 평판에 3개의 구멍을 뚫어 끈을 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에 끼워 신고다니도록 한것이 초창기 고지평리 아닐까 여겨진다.

짚신은 짚으로 쉽게 엮을 수 있으며, 신으면 가볍고 발이 편하지만,겨울에 눈이 녹거나 비가 오면 발에 스며들어 무 젖는 것이 단점이었다.

나막신과 짚신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고무신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부터인데 대략 1910년 고무신이 등장하며선 쇠퇴하기 시작해 1950년대 들어 실질적인 사용이 크게 줄어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초까지 시골 일부 농가에는 고무신이 애용되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이제 사용이 끊겼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고무제품과 피혁제품의 다양한 신발종류가 넘치는 오늘날 나막신을 신던 선조들의 지혜와 한복입은 그시대 멋쟁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찬란한 민족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