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7 >

사후세계에 대한 광기 어린 마음

2006-06-14     충청타임즈
진시황릉을 답사한 후 빙마용(兵馬俑)을 들릴 예정이다. 후와칭츠를 지나 동쪽으로 1km쯤 더 가면 거대한 봉분을 만나게 된다(입장료 26元).

황릉에 도착하자 꽃과 수목으로 잘 조성된 작은 언덕위로 석축계단이 나 있는데 계단 양쪽 과수원엔 석류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능묘라기보다는 작은 언덕 산을 오르는 기분이 든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秦始皇)은 13세 때 제위에 오른 뒤부터 자신의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살아생전에 자기 무덤을 만들면 장수할 수 있다는 당시 제왕들의 조묘관습 때문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조묘공사를 본격적으로 하였는데, 수인 70만 명을 동원하여 삼천의 깊이까지 착굴해서 동을 부어 현실(玄室)을 만들고 궁전과 문무백관의 상이나,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로 묘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도굴자가 들어오면 사살되도록 자동 발사되는 석궁 기관 장치를 설치하였다. 진시황은 이런 보물들과 장치들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관을 안치한 공인들이 현실(玄室)의 문을 잠그고 출구로 연결된 연도로 나왔을 때 출구를 막아 전원 생매장시켰다.

묘위에는 높이 500척(122.5m), 주위 5리의 분구를 쌓고 초목을 심어 산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능묘를 조성했다. 진시황이 죽은 지 3년 만에 그의 초대형 능묘는 진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고 만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69장에 보면 몽골인들은 진시황제와 같은 능묘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카안이 죽으면 알타이(Altai)라고 불리는 커다란 산으로 운구되어 매장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타타르의 대군주들은 어디에서 사망하든 설사 그 산에서 100일 거리나 떨어진 곳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시신은 그 곳 장지로 운구되어야 한다.

시신이 운구되는 동안 장지에서 40일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일지라도 도중에 부딪치는 모든 사람들은 시신을 옮기는 사람들의 칼에 죽음을 당해야 했다.

죽이면서 그들은 “가서 저승에서 주군을 섬겨라”라고 말한다. 그들은 정말로 자기들이 죽이는 사람들이 모두 저승으로 가서 주군을 섬긴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말(馬)에 대해서도 똑같이 행한다.

그래서 주군이 죽으면 그가 소유하던 최고의 말들을 모두 죽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주군이 저승에서 그것들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몽케칸이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이 장지로 운구되는 동안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집사(集史)의 저자 라시드 웃 딘도 칭기스칸의 시신이 운구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살해되었고, 장례 때에는 40명의 소녀들이 함께 매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몽골의 대카안들이 묻힌 알타이 산은 발견되지 않고 역사상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데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은 힘 있는 자들의 속성인것 같다.

‘사기’, ‘항우본기’에는 진시황의 무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킨 후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실을 태웠다. 불은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는데 금은보화와 부녀자를 거두어 동쪽으로 갔다.’항우는 아방궁을 불태우고 이어 진시황제 능묘도 파괴했는데 관(棺)에 들어가 이를 제치고 30만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물건을 날랐으나 다 나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도적 떼들이 곽.0실을 녹여 동을 훔쳤다고 ‘수경주’가 전하고 있는데 파괴되고 약탈당한 진시황의 이 능묘가 얼마나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릉의 정상에 오르면 능 뒤쪽으로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남서쪽은 넓은 들판과 시안 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다. 2000여 년의 비바람과 인위적 파괴를 무릅쓰고 높이 76m, 동서 넓이 345m, 남북길이 350m인 금자탑(피라미드)형태의 웅장한 능으로 살아남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대륙의 토대를 만들었던 차이나(China)라는 명칭도 진(Chin)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실로 상상을 초월한 인간 욕망의 표현이다. 이 세상에 끝이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극치의 영화와 권력을 누리고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제국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태워 영생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그 끝없는 욕망의 바다야말로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지난 여러해 동안 이곳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문물들을 종합해보면 진시황은 죽어서도 지하왕국에서 여전히 3군을 호령하고 위대한 통치자로서 군림하고자 하는 군주로 영원히 남기를 바랐던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의 고혈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독재자의 유물이 오히려 오늘날 시안을 먹여 살리는 세계적인 관광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 불가사의한 인간 욕망의 산물을 두고 찬탄과 경외감을 갖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혈관 밑바닥에도 진시황의 저 거대한 욕망의 파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과 평화보다는 위대하고 강한 것을 동경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의 바다가 살아 꿈틀거리기에 진시황의 욕망의 잔해가 파도처럼 밀려와 숨을 멎게 만들고 있다.

진시 황릉을 답사한 후 유럽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어디론가 제 갈 길을 떠나는 그런 만남과 헤어짐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인·극동정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