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승

무심천

2008-05-15     충청타임즈
강 대 헌 <교사>

지난주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 살고 죽는 일이야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지만, 어떤 이의 경우는 그의 마침표가 너무도 아쉬워서 몇 번이고 그의 인생책(人生冊)을 덮지 못한 채 자꾸만 뒤적거리게 된다. 그분이 그랬다. 박(朴)·경(景)·리(利).

대하소설 토지(土地)를 쓴 소설가로서 이 작품을 26여년간(1969∼1994년) 집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뤘다고 소개되는 그분이 마침내 떠났다.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의 텃밭에서 직접 키운 고추를 방문객들에게 권하던 거친 손을 휘휘 흔들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고 말았다.

그분의 삶은 어떠했는가.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이 세상의 끝으로 온 것 같이/무섭기도 했지만/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나를 지탱해주었고/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옛날의 그 집' 중에서).

그분의 유작시(遺作詩)에서 어떤 숭고한 사명감(使命感)을 느낄 수 있었다. 1750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실화를 다루었던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에서 과라니족에게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대한 폭포를 맨몸으로 오르던 가브리엘 신부의 모습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분은 왜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사마천이 궁형(宮刑)의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간 이유는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시에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던 그로서는 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고, 박경리 또한 토지를 끝내기까지는 자신의 삶이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이 무한했을 것이다.

사실, 그분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6·25 전쟁 중에는 남편과 아들을 잃었고, 토지 집필 초기에는 유방암 판정을 받아 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분에게 문학은 생명줄이었고,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불행에서 탈출하려는 소망 때문에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한 그분은 이제 누구의 곁에 있는가.

'옛날의 그 집'의 마지막 연에서 그분이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했는데, 그분을 몹시 그리워하는 소설가 한창훈은 "선생님의 곧은 정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지금도 도처이고 넓고 깊은 품을 원하는 이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홀연히 가버리시는 뜻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제는 알아서 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거듭 땀 흘리라는 소리겠지요"라고 화답했다.

앞에서 말한 영화에는 이런 나레이션(narration)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죽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큰 스승은 큰 정신으로만 기억되는 법이다.

누가 이 시대의 큰 스승인가. 오늘은 꼭 한 번 물어보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