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 먼지 털 때 됐다
사형제도 먼지 털 때 됐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3.25 23: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스크의주장
권 혁 두 부국장 <영동>

20대 직장여성 2명의 자취방에 심야에 괴한이 들었다. 괴한은 다짜고짜 흉기를 휘둘러 여성 1명을 쓰러트리고 넋이 나간 다른 여성을 겁탈하기 시작한다. 피투성이의 친구 주검 옆에서 그녀는 수시간 동안 유린당했다. 욕망을 채운 괴한은 그녀에게 샤워를 하도록 요구한다. 그녀의 몸에 남아있을 자신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다. 괴한은 몸을 씻고나온 여성에게 비닐봉지를 씌워 질식사시킨 뒤 유유히 현장을 떠난다.

흉기에 찔려 방 한구석에 쓰러졌던 그녀의 친구는 괴한의 확신과 달리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살이 찟겨나간 고통을 참고 숨소리를 죽여가며 친구가 갖은 고통을 받은 끝에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목도해야 했다. 지옥보다 더한 시간을 참아내고 그녀는 구제됐다. 범인은 멀쩡한 이웃집 청년이었다. 그는 이날 아침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한 기업체에 나가 취업을 위한 면접을 보다가 체포됐다. 실제로 연전에 국내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스릴러나 액션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스파이나 갱이 상대에게 무언가 자백을 요구하며 내뱉는 말이다.

"너는 어차피 죽는다. 말을 들으면 단번에 죽여주고, 그렇지 않으면 천천히 고통을 가해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겠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방법이 대수냐고 반문하겠지만 죽어야 할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 차이가 천국과 지옥일 수도 있다. 살인에도 자비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사건의 희생자는(실제는 살아서 현장을 함께하고 있었지만) 친구의 참혹한 시신 옆에서 수시간 동안 유린당한 후 살해당했다. 죽음의 공포에 떨며 그녀가 죽기 전까지 겪었을 절박한 시간들은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가위눌리게 한다. 전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안양의 두 어린이도 살인자로부터 일체의 자비를 받지 못했다.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죽었고 죽은 이후에도 끔찍스런 굴욕을 당했다. 부모들이 절규하는 것은 아이의 죽음보다도 죽기까지 어린 자식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이 가슴과 뇌리에 사무쳤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 신문의 칼럼을 섬뜩한 살인행각으로 거칠게 시작한 것은 희생자들의 입장에서도 살인범죄가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끔찍한 범죄들로 인해 최근 재연된 사형제 존폐논란에 인권론자들뿐 아니라 희생자들의 목소리도 담아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너 자꾸 까불면 텍사스로 보낸다." 미국에서 한때 친구간에 오갔던 농담이다. 우리는 대통령이 사형집행장에 서명하지만, 미국에선 주지사가 한다.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주지사 시절 거침없이 사형집행을 결재한데서 비롯된 농담이다. 사형 반대론자들은 그를 '냉혈한'이라고 비난했지만 법치국가 공직자로서 책무에 충실했다는 평가도 따랐다.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사형제도가 보류되고 있다. 사법부는 사형을 선고하고 행정부(대통령)는 사실상의 무기형을 집행하는 모순이 계속되고 있지만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사형제를 거들면 그 잘난 '진보'에서 퇴출돼 '시대착오'로 몰리는 세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엄연한 실정법이 매장되는 이 어정쩡한 상황은 최초 노벨상 수상자를 내는데 기여했던 선에서 마감돼야 한다. 사형집행을 보류하는 것이 대통령과 정부의 소신이라면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이 맞지, 집행을 유야무야시켜 법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것은 옳지않다. 국민의 안녕과 권리를 보장해 줄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의 결정이 보류되고 거부되는 전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참혹하게 인권과 생명을 짓밟힌 희생자들도 지하에서 세습되는 '직무유기'에 항변하고 있을지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