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 박병모 기자
  • 승인 2008.03.18 2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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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박 병 모 부장 <진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일수록 우리나라보다 잘 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인수위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한민국엔 영어 광풍(狂風)이 불기 시작했다.

모국어도 아닌 영어를 모든 국민이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하는 국민적 논의나 깊은 고민도 없었는데 벌써부터 전국에서 광풍이 불고 있다.

새 정부는 "아직 결정된 게 아니다"고 하지만 벌써 학원가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있는 곳이면 '영어'가 거침없이 득세한다.

영어만 잘하면 유능한 사람이 되고 영어를 못하면 원하는 대학도, 취업도 불가능하고, 직장에서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는게 옳은 현상인가.

한글도 모르는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고, 영어발음을 잘하려고 혓바닥 수술을 하는 이런 광풍은 해외언론의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취업시험에선 토익·토플점수가 당락을 좌우하고, 토플시험 한국응시생이 세계 전체 응시생의 20%에 육박한다.

영어교육에 이성을 잃은 곳은 학교뿐만 아니다.

공식 집계로 본 영어학원은 전국에 3000여개라지만 실제로는 1만개가 넘고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만도 한해 2조원 가량이나 된다고 한다.

지난해 20만이 넘는 학생들이 국외로 유학·연수를 떠나 그 비용만도 7조원을 넘어섰다.

미국을 아니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에 대한 '신사대주의 교육'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만하다.

그러나 영어숭배주의자를 비롯해 상업주의까지 가세한 현재의 영어 광풍은 개인의 인격을 비롯한 삶의 질까지 지배하고 있다.

영어교육에 대해서만은 교육 관료를 비롯한 교사, 학부모들 대부분이 이성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다.

철학도 소신도 없는 무국적 정책이 온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에 빠트릴 것이란 것은 소설가 이외수 선생의 한마디 일갈을 통해 예견된 바 있었다.

세계 경제를 가늠하는 그 어떤 수치를 대입해 봐도 '비영어권 국가중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잘 산다'는 통념은 성립될 수 없다.

단적으로 '일본 국민이 한국 국민보다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더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일간의 영어능력을 비교하면 우리 국민이 더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일본인들이 눈부신 경제성장과 부를 일궈낸 것은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의 것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지, 단순히 영어를 잘 구사했기 때문은 아니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영어과잉'의 나라였다.

그런데도 아랍권 국가에서 자국민이 납치되었을 때 정부에 아랍어 전문가가 없어서 협상에 차질을 겪었던 그런 나라다.

외국어의 다양성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런 나라였다.

새정부는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학부모를, 학생을, 아니 전 국민을 질식시키고 말 영어광풍을 여기서 멈춰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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