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안정 나씨
24. 안정 나씨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8.03.0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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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읽는 문중 그뿌리를 찾아서
충·효·덕 갖춘 조선시대 명문가

시조 나천서, 고려 공민왕때 문하시중 지내
1600년쯤 나사종 청원군 비홍리에 터잡아

청원군 북일면에는 기러기가 나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하여 '비홍리'로 불리는 마을이 있다.

비홍리마을은 다시 위쪽 마을을 비상리, 가운데 마을을 비중리, 아랫 마을을 비하리로 불렀다.

이중 기러기가 나는 형상의 머리에 해당되는 비상리는 초계 변씨의 세거지이고, 기러기의 배에 해당되는 비중리는 안정 나씨의 세거지다.

초계변씨와 안정 나씨 문중의 못자리로 잘 알려진 이곳은 두 가문 모두 조선시대 효자 배출하며 비홍리마을의 충효의 가문으로 쌍벽을 이뤘다. 두 가문 중 먼저 3대에 걸친 4명의 후손이 기일이 같은 날로 독특한 내력을 지닌 안정 나씨 문중을 찾아가 보았다.

경상도 안정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나씨 시조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나천서다.

고려사에 의하면 "나천서는 공민왕 19년(서기 1370년) 이성계와 더불어 북녘 동령부를 평정하고, 군량 부족으로 굶주린 병사에게 수백석의 곡식을 제공하고 기울어 가는 국운을 만회하려했다"고 한다.

이 공로로 경상도 안정현을 하사받아 안정 나씨의 시조가 되었다.

청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1475년 나사종이 부친의 상여를 따라 청주 비홍 옛집으로 내려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1400년쯤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로 약 600년 동안 지역에 뿌리내린 문중의 역사는 비중리마을의 역사와 함께하며 많은 유적을 남겼다.

청주에서 초정리로 새로 난 우회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비중리라는 돌비석 옆에 홍양사란 표지석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들어가면 측면으로 세워진 홍살문과 큰 마당이 이어지며 안정 나씨 문중에서 충과 효, 덕을 갖춘 여섯명의 인물이 배향한 홍양사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너른 마당에는 삼세충효문의 정려각과 삼세충효비, 충의비 등 안정 나씨와 관련된 유적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삼세충효문은 가문의 뚜렷한 족적을 드러내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충북도 기념물인 삼세충효문은 앞서 밝힌 3대가 같은 기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1486년 경흥 부사 나시종은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한다. 이에 그의 아들 나운걸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백의종군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3년 상을 마치고 자결한다.

이에 나운걸의 아들 나빈과 나린 형제도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버지 나운걸의 3년 상을 마치는 날 역시 자결한다.

이리하여 3대 4명의 후손이 기일을 같이하는 선례를 남긴다.

현대이늘은 쉽게 공감하기 힘든 이 이야기는 비홍리는 물론, 조선시대의 충과 효의 표상이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전통은 후손들에게 이어지며 비상초등학교와 내수초등학교 강당, 부강초등학교 강당 설립에 토지희사 등 문중의 인물들이 설립을 추진함으로써 지역의 교육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 인물 & 인물

효행·학덕으로 문중 혈통 이어

문인·학자 등 걸출한 인물 배출
현재 지역 교육계서 큰 역할 담당

고려 공민왕때 이성계와 함께 공을 세운 나천서는 재상까지 오르지만 고려 국운이 다하자 충과 신의 절의를 지키며 은거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후손들은 4대째 독자로 내려오다 5대 오유선이 아들을 삼형제두며 세 곳으로 흩어져 뿌리를 내린다. 그중 맏아들 나계종은 한성부 참윤을, 둘째 나연종은 청산 현감을 지냈으며, 막내 나사종은 경흥도호부사로 여진족의 침입을 막다 전사함에 따라 충정의 시호가 내려진다.

청원군 비중리 인물 나사종의 전사로 아들 나운걸과 손자 나빈·나린이 스스로 자결하며 충과 효를 보여줌으로써 훗날 삼효문이 세워졌다. 그리고 나사종의 시체를 안고 울다 적에게 죽임을 당한 관기 박선이와 아복 이춘금을 기리는 충의비가 지금도 홍양사에 남아있다.

또한 조선조 명종 때 나식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나숙은 홍문과 부제학을 지내며 청백리로도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인조 때 인물 나만갑은 병자호란의 명신으로 증좌의정에 올랐으며, 나양좌는 숙종 때 도학이 깊은 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는 이들에게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문장과 성리학에 밝았던 나식은 을사사화로 강계로 유배돼 죽고, 나숙 역시 철산으로 유배되어 경원에서 죽는다.

이렇게 을사사화를 비롯해 몇 차례 정변 때 큰 화를 입은 이들 가문에선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효행과 학덕으로 문중 혈통을 잇는다.

비중리 3대 4손 인물 외에 나상악은 면협의회의원과 군평의원을 역임했으며, 비상초등학교가 세워지기까지 개인의 밭을 희사해 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또 사유지 900평을 마을 공동 경작지로 내놓았는가 하면, 유림의 추천으로 청주향교 전교를 지내며 우리 전통을 지켜나가는 일에 힘을 쏟았다.

비상초등학교설립 추진과 더불어 내수중학교 강당 건립을 위해 희사한 나상헌씨는 청주향교 전교와 청주군협의원과 충북협의원에 피선되었다. 또 현직참봉을 지낸 나헌용씨 역시, 부강초등학교 강당건립에 희사해 지역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홍양사 앞에는 이들 3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안정 나씨의 현대인물로는 문화시장을 표방한 나기정 전 청주시장과 자연과학 발전에 기여한 나기창 박사, 나덕찬 전 신흥고교장, 나광찬 전 보사부이사관, 나상길 광고협회충북지부장, 나기준 전 건강보험관리공단 부장, 나능찬 국민연금공단 부장, 나기황 전 신한은행지점장, 나기상 대전대교수, 나기창 전 충북대학장, 나동석 전 청주대학장, 나시찬 사무관, 나기현 회사대표, 나경욱 인제대교수, 나재웅 공학박사, 나재준 이학박사, 나경준 고인쇄박물관학예사 등이 있다.

청원군 비중리 홍양사에는 3대 4손의 충과 효를 기리는 정례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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