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 있느냐
너 어디 있느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2.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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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상 수 신부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장>

정치에 대한 국민의 참정권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처음으로 지주들에게만 부여되었다. 오랜 투쟁 끝에 중간계급과 노동자 계급에도 참정권이 확대되었다.

오늘날처럼 여성도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20세기에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에 태어났고 민주주의를 잘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민주(民主)는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확대 해석을 해보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치든 경제든 사생활이든 종교생활이든 전반에서 이뤄져야 하는 철학적 함의이다.

그런데 진정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 지 곰곰이 반성해 본다.

별생각이 없다가도 밤늦은 시간에 TV에서 프라이드치킨이나 라면 광고를 하면 슬슬 구미가 당긴다.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어찌 그 늦은 시간의 TV광고뿐이랴 거리를 나서면 온갖 광고 전단들과 사람들의 말 말 말들이 또 있다. 여기 저기 이것저것을 다 듣다 보면 나의 시각과 판단과 가치들은 어디에 있는 지 오리무중이다.

신문에서 전하는 사설을 그대로 자신의 생각인 양 판에 박은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들. 현란한 광고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자신의 인격이나 품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가 각자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변에 의해 떠밀려 사는 인생은 아닌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온전한 소리를 듣고 살았던 때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린 시절의 생각과 판단은 부모님에 의해서, 학교를 다닐 시기에는 선생님에 의해서, 성인이 되어서는 자사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교묘히 숨기는 언론들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는가 그런 생각과 판단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정치인과 국가 지도자를 뽑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막대한 권력을 위임한다.

25일 제 17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함께 할 내각도 이미 발표하였다. 국가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판단기준은 무엇이었던가 물질의 가치가 인간과 생명과 양심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지는 이 시대, 우리의 참정권은 부끄럽지 않은 권리 행사인가 스스로가 한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 되고자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던 그 역사를 유산으로 가질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온전한 판단력의 주인일까 이제 바르지 못한 정치인이 설 자리는 없어야 된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딸이 연설에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할 때 여러분들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했다는 강력한 참회의 말이 생각난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죄도 없고 그래서 부끄러움도 없었던 시대에 죄를 짓고 부끄러움도 알아버린 아담을 불러내는 말씀이시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날 세상의 온갖 불의와 죄에 눈감고 세상 속에 숨어사는 우리 자신을 불러내는 말씀이기도하다. 정치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호화 사치생활과 비도덕적 행위가 종교인의 문제로 지적된 지 오래다.

아담의 부끄러움은 이제 성역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럴까 부끄럽게도 오늘따라 더욱 크게 들린다.

"너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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