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02.2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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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한 인 섭 <사회체육부장>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지난해 국방부 직할 부대 '유해발굴 감식단'이 창설되면서 한층 탄력을 받았다.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이 사업은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희생돼 이름모를 산야에 묻힌 국군 유해발굴에 초점을 맞춰 시작했다.

6·25 당시 사망했거나 실종된 국군 숫자가 13만명 정도로 추산된다는 게 당국의 공식적인 통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관련 유가족수는 이 보다 몇배에 달한다 할 수 있다. 종전 50년 가까이 지났던 2000년에서야 시작된 이 사업은 늦은감 있지만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2007년 말까지 모두 2018구에 달하는 유해를 수습했다. 유품 역시 3만9973점을 발굴했다. 이 사업이 본격화된 지난해에는 전국에서 539구를 발굴하는 등 활발히 추진됐다.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도 100여구 이상 찾았다. 덕분에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지난해 국방부 정책 고객이 뽑은 '최고 국방뉴스'로 선정되는 등 관심을 끌었다. 미국 등 유엔군 전사자 발굴작업도 이뤄져 한·미 양국 군은 지난해 11월 경기도 파주 일대에서 공동발굴과 감식작업을 했다. 당시 미국은 전문부대인 실종자 확인사령부(JPAC) 요원과 인류학자와 치의학자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발굴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는 듯한 우리 사정과 달리 신원확인에 더욱 신경을 썻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 전사자 발굴에 초점이 맞춰져 상당부분 가려지긴 했지만 이 사업에 북한군, 중국군 유해도 포함된 사실은 달라진 남·북관계나 국민정서를 가름할 수 있는 또 다른 잣대로 평가할 수 있다.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북한군 유해를 발굴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념논쟁을 야기하기 충분했다. 아마 논쟁에 휘말려 사업 추진이 어려웠을 것이다. 적군의 유해를 발굴하는게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는 것과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북한군 전사자까지 포함시킨 유해발굴사업은 50여년이 지나 시작됐지만 '전쟁의 상처'를 씻으려는 노력이자 좋은 본보기로 평가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도로공사 현장에서 나온 북한군 추정 유골에 대한 당국의 처리방향 역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1950년 9월부터 1951년 7, 8월 무렵 옛 청주상고(현 대성고) 강당에 주둔했던 북한군 임시 야전병원 터 인근에서 유골 3구와 전투화(통일화) 등 유품이 나와 추가 매장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야전 병원 인근 저지대와 방공호 등에 전사자들을 '슬쩍슬쩍 버리고 묻었다'는 토박이 주민들의 진술도 나와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 한다.

공사현장에서 유골이 나오자 행정기관은 '무연고 분묘'에 준하는 규정을 따라 처리했지만 주민들은 달랐다. 북한군 가매장 사실을 알았던 80대 노인들이나 나중에 이사와 사연을 전해들은 주민들이나 현장에 모여 꽃다운 나이 전쟁터에 끌려나와 목숨을 잃었던 영혼들을 위해 '잔'을 붓고, 위로했다고 한다. 이 동네 주민들은 유골 주인이 아군이든, 북한군이 됐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현장 상황을 들어보면 과거처럼 '냉전의 그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정서속에는 종전과 같은 '벽'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국군 전사자·실종자가 13만에 달하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1% 정도에 불과하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상당수는 북녘 땅에 있다. 청주 내덕동 상황이 북에서도 흔히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답은 간단해 진다. 국방부의 성의있는 조사와 추가 발굴 등 적절하고 가능한 조치가 뒤따라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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