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동행하기
시간과 동행하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2.2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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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든 관심을 자아낸다.

시간을 대하거나 보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해도 사실은 대동소이하다. 딛고 있는 발판이며 마시는 공기가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나와 다르다고 해도 큰 차이가 없다. 조금 더 낫거나 덜하거나 그 사이다. 조금 더 비슷하거나 다르거나 그 차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현미경으로 볼 것인가 혹은 망원렌즈로 볼 것인가라는 것인데, '다름'을 현미경으로 본다면 차이는 무한대로 늘어나 접점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또 그것을 망원렌즈로 본다면 차이의 긴장감은 한순간에 사라져 이야기는 밋밋해진다. 그러니 보통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보통의 눈으로 보아도 그러나 '데르수 우잘라'의 삶은 다르다. 달라도 아예 달라서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데르수 우잘라'는 책을 쓴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가 1907년 러시아 동쪽에 있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탐사할 때 안내인으로 동행한 나나이족 사람이다. 말하자면 원주민으로 그의 먼 조상들이 살아온 방법 그대로 그곳에 터를 잡고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다. 블라디미르는 우잘라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길이나 숲에 찍혀 있는 낯선 발자국만 가지고도 어떤 연령의 사람이 어떤 몸 상태에서 무엇을 가지고 왜 가는지, 얼마쯤 전에 지나갔는지 알아맞히는 사람. 물고기 이야기를 알아듣고 다람쥐와 호랑이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 바람이 얼마쯤 뒤에 어떻게 불어올 것이며 거센 비가 언제 그칠지 아는 사람. 산에서는 비가 아무리 내려도, 바람이 불고 눈이 쌓여도, 기온이 많이 떨어져도 몇 달이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한 달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 결정적으로 사람과 동물과 나무를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 문명에 발을 걸쳐 놓았다가 몸에 지닌 얼마의 돈을 노린 자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 사람.

데르수 우잘라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시호테 알린 산맥을 탐사한 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쟁하거나 조정하거나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자연의 질서와 시간에 순응한다. 계절이 변화하면 변화하는 대로, 하루가 저물면 또 저무는 대로 묵묵하다. 태풍이 불어오고 비가 며칠씩 내려도 숲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며 담담하게 적응하였다. 이미 데르수 우잘라 자신이 자연 자체이며, 그 삶이 산과 숲에서 살아가는 여느 동물이나 식물들의 삶과 하나처럼 어우러져 있다. 대자연에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리라. 그럼으로써 데르수 우잘라와 그의 동료들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라 동행자이다. 이것이 우리와 다르다. 아예 다르다.

우리는, 혹은 나는 시간과 동행하기를 꿈꾼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고 우잘라처럼 숲으로 갈 수도 없다. 우리 현실에서 사실 시간과 동행하는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반대로 말해보자. 어떤가. 우리는 속도에 내몰리고 있다. 우리가 시간을 구획정리해 놓았으되, 거꾸로 우리는 시간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우잘라의 모습은 경이로운 거울일 수밖에 없으나, 문명의 상식은 그와 같은 삶을 미개한 것이라고 야만이라고 단정하고 가두어 버린다. 그런 가운데 '데르수 우잘라'는 멸종해 버렸다. 꿈을 꾸되, 닿고자 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게 허물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벌써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신 그저 거울로, 꿈으로만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동행하기를 포기한 문명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라거나, 자연 자체로 살아가는 삶을 무시하고 비웃는 도시의 삶은 소박한 즐거움과 깊은 유대감을 지켜 내고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자위하고 싶어만 하는지도 모른다.

책: 아르세나예프, 데르수 우잘라. 갈라파고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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