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원로가 있는가
우리 시대, 원로가 있는가
  • 이재경 기자
  • 승인 2007.11.1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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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 재 경<부장(천안)>

1. 1989년, 충북 제천에서의 기자 초년생 시절. 당시 지원장으로 부임해 온 김기수 판사와 단 둘이 저녁 식사를 했다.

담소 중, 퇴근 후 밤 시간대에 뭘 하며 소일하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말이 재미있다.

"가끔 암행(暗行)을 하죠. 주로 혼자 시낼 걸어 다니며 둘러 봅니다."

"암행요 지원장님이 왜 암행을 하죠 어사도 아니고."

"그냥. 어떻게들 사나 궁금하고 또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별 의미를 두지 않은 답변인 듯 했지만, 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임지의 한 기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한 말 같아 꽤 인상깊게 '암행'이란 말을 가슴속에 새겼다.

노무현 대통령과 사시 17회 동기로 36세의 늦은 나이에 법복을 입은 그는 1999년 고법부장 승진에서 누락된 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4년 후 서울북부지원 수석부장판사로 초라하게() 정년 퇴임한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법관은 승진이 아니라 판결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 때문에 네 번이나 판사실을 떠나 변호사 개업을 하려 고민했다. 그러나 판사로서의 자긍심이 더 소중했다"고 말한 그는 지금도 후배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선배로 남아 있다.

2. 관선, 민선 포함 네 차례나 천안시장을 연임하다 퇴임한 이근영 전 천안시장이 정치인 중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전두환 정권 초기 사회정화위원장을 맡아 삼청교육대 지휘자로 '저승사자'라는 별칭을 얻었던 충북 제천 출신 이춘구씨다.

퇴임을 앞두고 이 전 시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이춘구씨와 TK의 맹주 김윤환씨를 비교하는 말을 했다. 5선 고지가 보장된 국회의원직을 마다하고, 무 자르듯 정계 은퇴를 선언한 후 일체 바깥 활동을 금하고 있는 이춘구씨와 아직도 할 일이 남은 것으로 착각, 어정쩡한 행보를 보인 김윤환씨를 비교하며 '물러서는 방법을 알았던' 이춘구씨를 추켜 세웠다.

최전방 부대장과 육국본부 감사실장 등을 지낸 그는 아직도 군 후배들에게 충용의 의기를 갖췄던 무인(武人)의 전범으로 자리하고 있다.

3. 요즘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박태준 전 포철회장의 위인전을 펴내 화제다. 생전에 써진 자서전이기에, 그를 신채호,김구 선생과 같은 반열에 올려 위인전을 펴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오류없는 삶,우리나라 경제성장동력인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로 이끈 공로를 인정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는 군인, 기업인, 정치인의 세 가지 직업을 가졌다. 그 중 정치인으로서 그의 이미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 8일 있은 출판기념회에서 조정래씨는 "박 회장의 인생역정을 취재하면서, 글을 쓰면서, 교정을 보면서 세 번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으나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성공담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4.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가세로 대선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그가 누군가. 아직 정치권력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청와대를 감사하겠다고 나섰던 인물이 아닌가.

돌연 정치판에 뛰어든 그는 두차례나 대통령에 도전했다가 만신창이가 될 정도의 상처를 입고 울먹이며 2002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쪽', '영원한 감사원장'의 영광스런 별칭도 서서히 묻혀져 버렸다. 그런 그가 다시 오욕의 정치판으로 뛰어 들었다.

자, 여기서 정치판에 내 던질 질문 하나. 원로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 시대에 원로는 있는가. 원로를 대접하고 있는가. 또 원로를 대접해 줄 지도자가 있는가. 영원한 법관, 영원한 기업인, 영원한 군인. 그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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