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개성 왕씨
14. 개성 왕씨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7.11.0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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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읽는 문중 그뿌리를 찾아서
고려조 500년 간 왕족으로 군림

시조 국조,대이어 송악지방에 세거해온 호족집안
임진왜란때 왕옥→문주리,왕잠→사인리에 터잡아
왕건의 십만대군이 이곳에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 방서동의 방정

고려 개국 500년 동안 왕족으로 군림하며 살아온 개성 왕씨는 태조 왕건의 후손이다. 궁예와 견훤 등 많은 영웅들이 황제를 꿈꾸던 격동의 시대에 후삼국을 통일하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우리나라 역사상 2번째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한다.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문을 연 태조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개성을 수도로 정하고 호족정치를 펼친다. 이후 500여년간 개성 왕씨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왕가로 군림한다.

고려 개국 이전의 왕씨는 대를 이어 송악 지방에 세거해 온 호족 집안으로, 시조는 국조이다.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에 의하면 시조는 왕건의 증조로 성은 왕씨이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당나라 귀성의 후예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왕씨세보에는 선조가 중국 고대 황제의 후손이라고 전할 뿐 시조가 불분명하다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개성 일대에서 무역업으로 막강한 재력을 키운 왕씨 집안은 왕건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는 토대가 된다. 이는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개국으로 왕씨가 번창하면서 왕건을 개성 왕씨 1대로 섬긴다. 우리나라 역사의 500년을 고려 왕조로 이어온 개성 왕씨는 이로써 34대 왕조를 걸쳐 475년 동안 왕족으로 살아간다. 긴 고려의 역사와 함께한 왕가로의 세도는 거론조차 무의미하다. 황제라 하여 왕을 하늘로 모시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단단한 왕가의 성벽도 이성계란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는 조선의 문을 열게 되고, 왕씨 문중에는 최고의 권력을 누린 영화만큼이나 정치적 핍박을 받게 된다. 조선 개국공신들의 주창으로 이성계는 극소수만 제외한 대부분의 왕씨를 거제도와 강화도로 이주시킨 뒤 수장해 왕씨 문중은 멸존위기로 치닫는다. 이후 조선왕조는 400여년 동안 고려 왕가에 대한 정치적 결박을 풀지 않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왕씨 일각에서는 전씨와 옥씨, 차씨로 개명해 목숨을 유지하기도 했다.

역사 속에 수장되었던 왕씨 문중의 숨통을 트여준 이는 흥선대원군이었다. 그는 왕씨를 중용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고종이 그 뜻을 잇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는 조선도 역사의 바다에서 마지막 항해중이었으니 그야말로 아리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강내면 학천리에는 입향시조 왕잠의 묘소가 오랜 세월을 딛고 남아 있다.

개성왕씨가 청주에 이거 해온 것은 1600년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왕옥이 남일면 문주리로 이거하고, 왕잠은 강내면 사인리로 이거하면서 입향시조가 된다. 이후 400여년을 청주에 세거했지만, 문중과 관련된 유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철저하게 조선이란 나라에서 배제된 채 살아온 문중의 역사를 '아무것도 없음'으로 증명하고 있다. 

◆ 인물 & 인물

500년 고려사 중 34명 왕의 반열에

혁신적인 정치가 왕건, 광종, 공민왕
조선개국으로 멸족위기… 문중의 자부심으로 버텨

왕철수
왕건의 등극으로 왕족이 된 문중은 고려 500여년 동안 최고의 권력을 잡는다. 무역상 아들였던 왕건은 신라말 어지러운 정세를 바로잡고자 스무살에 궁예의 휘하로 들어간다.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궁예의 신임을 투텁게 얻으며, 승승장구하던 왕건은,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자 918년 중신들의 추대도 왕위 오른다. 이로써 왕건은 고려의 시조가 되었으며, 각 지방에 활거하는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정략결혼을 실시함으로써 불안정한 고려의 국가 기반을 다진다. 이후 500년 고려사 중 34명이 왕의 반열에 오르는데, 그 중 광종과 성종, 문종, 공민왕 등은 왕권정치와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의 위상을 추구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의 개국으로 왕가의 대가 끊긴 문중은 멸족위기 속에서 400여년 조선시대를 근근이 연명한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왕씨에 대한 색출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잡히는 이 모두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직 진출이 사실상 막혀 있던 만큼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한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문중 인물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리고 문장과 그림에 뛰어났으며, 이황과 교분이 있었던 왕희걸은 문중에서 최초의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었고, 선조 때 왕의성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대된다.

이후 수난 속에 살아야 했던 이들은 18세기 정조 때 이르러서야 왕미가 교서감을 지내며 정치권에 나타난
왕성래
다. 또 흥선대원군은 왕씨 인물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고종 때는 판서를 지낸 왕경석과 동부승지를 지낸 왕정양이 벼슬한 인물로 이름을 오르내리게 된다.

근대 인물로는 대한제국 말기 독립운동가인 왕재일이 비밀단체 성진회를 조직해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청주로 이거해 온 왕씨 집안은 지역에서도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조선의 철저한 왕씨 가문에 대한 억압 때문으로, 정치나 학문 분야에서도 어느 하나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어 멸족시키려했던 조선의 정책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주에서는 17세기 인물인 왕린이 북일면 죽림영당에 모셔져 있고, 충북미술의 대중화를 이룬 왕철수 화백을 현대 인물로 꼽을 수 있다.

비록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조선시대를 지나왔지만,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인물로는 왕하수(전 육
북한의 국보 왕건상
군대위), 왕종학(전 충북도 농무과장), 왕상은(전 민정당국회의원), 왕성래(전 청원군청) 등과 청주시청 공무원에 왕종필, 왕명순, 왕종일, 왕은경씨 등이 있다.

왕성래씨는 "멸족의 참변을 겪은 조선시대가 400여년 동안 이어진 뒤, 지역에서 큰 이름을 날린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며 그러나"고려 역사를 세운 문중의 자부심과 멸족의 위기 속에서 개명하지 않고 씨족을 이어왔다는 자부심이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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