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와 사람, 사람과 목수
목수와 사람, 사람과 목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0.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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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371년의 역사를 지닌 미국 하버드대 최초의 여성총장 드루 길핀 파우스트(Faust)는 얼마 전 취임사에서 "교육은 사람을 목수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목수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어김없이 입시철이 다가오면서 "대학교는 공무원 양성을 대학교육의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느니 "취업률 %"운운을 강조하는 한국의 대학상황과 비교하면 얼핏 이해가 되지않는 말이어서 곱씹어 볼 일이다.

흔히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바뀌는 교육정책과 입시 제도를 두고 혀를 차는 대목에서 필수적이다시피 등장하는 비아냥거림에 자주 인용되는 경구이긴 하다.

그러나 백년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숫자의 한계적 가치기준이 아니라 그만큼 요원함과 불변의 진리를 담아야 한다는 정성적 모색이 담겨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원을 제외하고도 초등학교 6년, 중ㆍ고교 6년 등 12년의 세월을 오로지 대학진학에 초점이 집중되다시피 하는 현행 교육제도에서 참다운 인성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대학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로 사람보다는 직업인의 육성에 집중하면서 취업률을 가치척도의 최우선적인 잣대로 설정한지 이미 오래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통계청의 2005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학은 모두 360개, 재학생 숫자는 293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지난 2004년 대학 입학정원 35만9417명을 대학 4년으로 환산해도 무려 150만명 이상이 대학에 더 머무르고 있는 셈인데, 이로 인한 국가 전체의 생산성 문제는 의외로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산·학협동과 기타 연구개발 등의 방법으로 대학이 사회와 경제에 직ㆍ간접적인 기여를 하는 바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평가를 적용할 수 있는 순수 대학 재학생은 결코 많지 않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적 한계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대학의 기능 자체가 순치되지 못하는 까닭은 각종 평가와 취업률 부풀리기 등으로 대학이 계량화되고 대학 역시 이런 잣대를 통해 도토리 키재기에만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상아탑으로 부르던 시대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학문이나 예술지상주의를 뜻하는 상아탑은 취업의 수단을 익히는 장소로 변모하고, 급기야 좋은 연구논문에 5억 원의 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나올 정도로 학문적 위상은 추락하고 있다.

물론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뜻으로 이태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취직만 된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극단적 표현이 나올 만큼 구직난이 심각한 현실을 감안하면 대학의 이 같은 정체성이 고육책일 뿐이라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원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현실과 중소기업의 구인난이 중첩되는 아이러니는 어쩔 것인가.

바야흐로 교육의 계절이다. 대입 수능시험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고, 로스쿨로 인해 대학은 또 다른 홍역을 치르고 있으며, 우리 도에서는 처음 실시되는 교육감 직접선거에 후보 2명이 경쟁을 벌일 듯하다.

그러나 고3 자녀를 둔 전국의 대부분 학부모가 반짝 1년짜리 입시전문가가 되고 대학이 취업에만 골몰하고 있는 사이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되돌아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대학에 가거나, 모든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좋은 직장에 편안한 일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사람을 목수로 만들기 보다는 목수를 사람으로 만드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그래서 우리에게도 심각한 고민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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