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비엔날레 애국가 제창의 의미
공예비엔날레 애국가 제창의 의미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0.07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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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 승 환 <충북민예총 고문>

지난 10월 2일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개막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충북의 시민(citizen)들과 수많은 국내외 작가 그리고 산자부 장관과 국회의원, 도지사 등 정치가와 관료들이 참석했고 지역의 예술가들이 함께 했다. 제5회 공예비엔날레는 여러모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사였다. 하지만 1996년을 전후하여 처음 공예비엔날레 논의가 있었을 때 각종 비난과 비판이 난무했었다. 당시 많은 분들은 공예산업의 하부구조(下部構造)가 약하다는 점을 들어서 청주는 국제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결과는 크라토피아 청주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성공적이다. 물론 각도에 따라서 부정적인 평가가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보완하고 개선해야 할 것으로써 앞으로 더 훌륭한 산업적 축제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 근본적인 부정은 아니다.

이 행사의 성공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나기정 시장과 그 가치를 잘 살린 한대수 시장, 성심과 성의를 다해서 행사를 이끈 남상우 시장,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국제적 수준의 행사를 잘 치러내는 관계자들과 지역예술계의 여러분들이 함께 이룬 성과다. 세계예술계의 동향(動向)이 말해주는 것처럼 현대 공예는 조각이나 설치미술과 그 경계가 없어져 버렸다. 작품만 놓고 보면 공예인지, 조각인지, 설치미술작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공예는 인간 주변의 모든 것이 공예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이처럼 공예는 예술사와 문화사에서도 중요하고 또 문명사나 사회사에서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공예의 현대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 행사를 산업적 축제로 상승시킨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이런 성공과 의미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개막식 행사의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이다. 많은 분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는 한다. 하지만 국제적 행사에서 개최 국가의 애국가를 모두가 함께 제창하기를 희망하고, 또 중심 국가의 국기에 대한 엄숙한 예의를 권하는 분위기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개막식장에 있던 많은 외국인들은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한국인들을 보면서도 손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어색한 시간을 넘기는 것이 목도되었다. 국가제창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또 엄숙하게 만든다. 국제행사라면 그런 엄숙함을 제거하고 편안하면서 품격있는 행사가 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국제행사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최된 제천의병제는 국제행사가 아니므로 관계가 없겠지만, 국제적 축제인 충주무술축제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호눌룰루 예술아카데미의 공예 매니저인 사라(Sara)라는 미국인은 하와이에서 왔다고 했는데, 개막식이 끝날 즈음 '미국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하기는 한다'라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 문장에서 '하기는 한다'라는 것은 국제행사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국가제창 등은 하지 않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하기는 한다'라는 것으로써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와 같은 대규모 국제행사라면 국가제창 같은 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음번에는 국가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행사관계자들에게 이런 의견을 제기할 처지도 아니고 또 제기한다고 해도 쉽게 바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사라의 조언에 답변을 하지 못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국가제창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와 같은 형식이 국제행사의 성격에 맞는지를 신중하게 숙고해야 한다. 아울러 국제행사 때 국기를 게양하지 않거나 애국가 제창을 하지 않으면 비애국자라거나 반역적이라는 식의 강제는 세계화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해 둔다. 이제 인간은 다중(多重)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적 보편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국민국가의 국민인 동시에 세계시민인 21세기에는 지나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반드시 국가와 민족에 유리한 것이 아니다. 외국인이 한국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을 때 세계 속의 한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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