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속사정
장미의 속사정
  • 연서진 시인
  • 승인 2023.06.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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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시인
연서진 시인

 

아파트 화단에 오월이 여물어 간다. 창밖을 보니 태양빛 등에 업은 장미꽃이 빨갛게 영글었다. 아치형 꽃 넝쿨 아래 여인네들이 꽃처럼 고운 웃음 입에 가득 걸고 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저들은 꽃줄기에 가득 붙은 진딧물을 보았을까….

오월이 가기 전 친구들과 서울 중랑천 장미꽃 구경에 나섰다. 서로 다른 조형물을 타고 오른 장미꽃은 파란 하늘 아래 어여쁜 빛깔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드넓은 꽃을 보는 사람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꽃줄기를 잡고 코와 입가에 꽃을 가져가 예쁜 표정을 지으며 호호 깔깔 즐거운 웃음소리로 중랑천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사진을 찍기 위해 꽃에서 조금 떨어져 섰다. 꽃에 손을 살포시 올려라, 두 팔을 벌리면 좋겠어, 가까이 다가가 꽃을 만지면 예쁠 것 같아,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는 어느새 작가가 되어 연신 주문을 넣는다. 장미꽃을 가만 들여다본다. 아, 역시 반기지 않는 그 녀석들은 꼭 들러붙어 있었다. 친구들에게 말했다. 꽃줄기에 진딧물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가기 싫다고 했더니 별나게 군다는 듯 본디 예쁜 꽃엔 벌레가 꼬이는 거라 말한다.

오래전 신혼 때 결혼과 동시에 서울을 벗어나 정착한 부평은 도무지 낯설기만 했다. 그 당시 업무가 컴퓨터로 전환되는 시기라 늦은 퇴근과 회식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아이도 없던 그때 늦은 밤까지 기다림은 몹시 지루했다. 책을 읽다 지루함에 창밖을 보았다. 남편의 차는 보이지 않고 문득 눈에 든 붉은빛… 졸음기 없는 눈이 더욱 말똥말똥 빛났다. 그 밤 누구도 다녀간 적이 없는 듯 요요한 달빛에 고고히 빛나고 있는 붉은 장미를 한참 동안 홀리듯 바라보았다.

밤은 깊고 어둠이 익숙할 때쯤 현관문 소리가 들린다. 거나하게 취한 남편, 집을 찾은 것이 용하지 싶었다. 횡설수설하는 남편의 손에 쥐어진 빨간 장미 세 송이 무심코 받았다. 술 냄새 진동하는 목소리로 선물이라며 내민 빨간 장미꽃은 미운 남편과는 다르게 예쁘기만 했다.

그래, 장미가 용서한 줄 알아라, 꽃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유리컵에 담아 식탁에 올려 두었다. 술에 취한 남편 눈에도 장미는 치명적으로 빛났나 싶었다. 그 밤은 그렇게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이른 아침 신선한 바람에 잠이 깬 나는 식탁 위에 장미꽃을 보았다. 다정한 미소가 절로 입에 걸린다. 물을 갈아주려고 컵을 든 순간, 으악 이게 뭐야! 싱크대에 놓아 버렸다. 꽃줄기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수많은 진딧물,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간밤에 꿈을 꾼 듯 장미의 고고함이 무색하게 꽃은 창밖으로 내쳐지고 말았다.

나의 소란스러움에 나온 남편은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장미 안부를 묻는다.

“장미 이쁘지? 내가 어제 당신 주려고 꺾는데 잘 꺾이지 않아서 입으로 끊고 가져온 거야.” 잘했다는 듯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남편을 보다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채기가 나고 퉁퉁 부어오른 입술이 보였다. 장미를 입으로 꺾었다더니 가시에 얼마나 찔렸는지 입술이 그날 밤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꽃을 꺾으며 그 많은 진딧물도 꿀꺽 삼켰을 남편을 생각하니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출근 준비로 거울을 보며 입술 상태를 확인하는 남편도 기가 막혔는지 웃는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입술을 만지며 연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남편의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눈물이 나오고 허리가 접히도록 웃었던 어느 오월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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