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시대의 요구
포스트모던 시대의 요구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6.0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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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현대를 근대 이후의 시대, 곧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라고들 한다. 근대는 인간의 주체나 자아가 중심이 되는(ego-centric) 시대이다. 이에 비해 현대는 타자(他者)의 시대이다. 타자란 자아(우리)가 아닌 것(다른 사람·다른 것)들의 총칭이다. 이 경우 자아란 나도 해당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를 포괄한다. 예를 들어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자아는 우리 식구에 해당하고 타자는 우리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일컫고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하면 자아는 우리나라 사람 전체, 타자는 우리나라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타자는 밖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 밖으로 밀려난 타자는 자아와의 관계 가운데서 피해를 보게 된다. 이기는 자가 중심에 서고 지는 자는 주변으로 밀려나 이기는 자에게 복속된다. 명문대에 합격하면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고 떨어지면 명문대 졸업생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선거에 이기면 세를 누리며 살지만 지면 쪽박을 차고 갖은 핍박을 견뎌내야 한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쥐락펴락한다.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은 타자의 희생을 통해서 유지된다. 곧 타자를 약탈함으로써 유지된다. 이런 삶의 방식은 근원적 한계에 봉착한다. 첫째, 나는 자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타자이기도 하며, 둘째 모든 타자는 자신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첫째, 나는 타자를 약탈할 권한도 가지지만 또 다른 `나' 에게 약탈을 당하기도 한다. 내가 부장이면 과장에게는 내가 갑(나)이지만 이사에게는 을(타자)이다. 마찬가지로 이사는 부장에게는 갑이지만 사장에게는 을이 된다. 국가의 최고 갑인 대통령은 외국의 지도자에게 을이 되어 빌빌댄다. 그래서 나(주체)는 모순적이다. 곧 나는 약탈하는 나이자 약탈당하는 타자가 된다.

둘째, 세상은 모두가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산다. 아무도 자신을 약탈의 대상인 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약탈하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까? 삶의 현장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된다. 이렇게 살면 모두가 공멸하게 된다.

서구의 철학자들은 이런 한계를 자각하고 19세기 말부터 자아의 착취대상이었던 타자의 처지를 재조명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산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주변부의 약자인 타자, 여성, 유색인종, 약소국, 감성이 중심부의 강자인 자아, 남성, 백인, 강대국, 이성의 약탈적 본능을 해체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걸 찾아낸다. 의식이 무의식적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는 프로이트, 부르주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층에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찾은 마르크스, 낮은 자들의 편에 서 있는 기독교 등이 대표 사례들이다.

인간이 경외해마지 않는 신은 인간이 절대로 아닌 존재이다. 곧 인간이나 이 세상과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 곧 절대타자(絶對他者)이다. 절대타자인 신은 자아(우리)의 편에 서지 않고 타자의 편에 선다. 곧 신은 낮은 자들의 편이다. 신은 권력자, 부자, 교만한 자들이 짜놓은 타자를 약탈하는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 신은 현실에서 성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보내달라고 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지옥으로 보낸다.

타자의 시대인 현대는 자아의 교만함을 버리고 언제나 타자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배려와 사랑, 자비로 보살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기를 극대화하는(maximize) 삶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을 최소로 내세우는(minimize) 삶을 영위할 것을 요구한다. 작금 이런 시대의 요구에 무지한 자들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무한 권력을 행사하며 무한 약탈적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언제나 타자의 편에 서 있는 절대타자로서의 신을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음을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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