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커튼콜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5.23 2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무대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울적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중년 후반의 얼굴이다. 찌푸린 표정에 주름살이 깊게 팬다. 멍하니 한참을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 긴 침묵이 지나가고 그는 관객에게 물었다. “내가 암이라니. 그것도 암 덩어리가 세 개나 있다는군요.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잘못한 거라곤 젊어서 아내에게 돈을 못 벌어다 준 죄밖에 없는데” 무거운 분위기에 객석은 조용하다. 
암전이 지나가고 다시 환해진다. 그는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삼. 사십 대의 삶이 필름처럼 펼쳐진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의 멀끔한 모습이다. 밖에서의 그는 인정받는 기자였다. 펜대의 힘이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허세를 부리게 만든다. 그 힘에 남들이 굽신거리고 대접받는 일은 위세 당당한 사람이 되게 한다.  
그런 그의 한 면에는 어둠도 있다. 가족의 생계를 아내에게 맡기고 책임지지 못하는 미안함이 있다. 그럴 때마다 자격지심은 더 위엄을 지키려 한다. 큰소리를 내고 강한 성격을 드러냈다. 그의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당장 신문사를 그만두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이 막막한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자신도 그만두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의 방백이 애처롭다. 아내는 그 직업이 좋아서, 자기만 좋자고 하는 일이라고 오해를 했다. 쉰의 나이가 가까워져 그가 과감히 신문사를 나왔다. 
다시 막이 바뀐다. 아내는 위풍당당할 때는 가족을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아 미웠는데 소심해지고 작아진 모습은 더 보기가 싫다. 그래도 가만히 기다려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그가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존심을 버리고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야 하는 일을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그의 고집으로 “버블그린”호를 출항했다. 세상의 바다는 만만하지가 않았다. 암초에 걸려 좌초되기도 하고 풍랑을 만나 험난한 여정을 버티는 그를 지켜보는 아내는 편할 날이 없다.  
출항하는 날이면 기도를 달고 산다. 바람이 불까, 눈이 올까,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걱정이다. 그런 날이 쌓이니 순항하는 날이 많아진다.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날도 늘어난다. 그의 가정에 웃음이 피어난다. 아들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로 떠난다. 살면서 이렇게 좋은 날이 와서 행복하다. 세상 걱정이 없는 그를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이런 날만 있을 줄 알았다.
또다시 찾아온 암전. 잠시 맛본 행복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이 무서운 병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혀를 차는 이들이 는다. “너무 행복하면 행복을 시기하는 걸까요. 그걸 호사다마라 하나요?” 관객을 향해 절규한다. 한참 고개를 떨구고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앞에 눈물이 툭 떨어진다. 그리고 거부하던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는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끝을 알리는 막이 내려간다.  
그가 사라진 무대를 향해 한 여자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친다. 관객들의 가세로 소리가 점점 커진다. 무대에 다시 등장해 관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대신 막이 올라가고 밝아진 그가 나타난다. 몇 곡을 더 들려주는 음악회처럼 또 다른 짧은 무대가 펼쳐진다. 이색 커튼콜이다. 
“아, 세상에 이런 일이. 너무 기뻐요. 병원에 수술 결과를 보고 왔는데 암이 한 개래요. 어제까지 지옥이었는데 오늘은 천당이네요. 이제 기쁜 일도, 좋은 일도, 웃을 일도 있을 것 같아요” 
그를 향해 희망을 응원하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이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한 여자의 눈물비는 멈출 줄 모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