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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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3.05.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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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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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비치(White Beach)는 청순한 여인이 세모시 옥색 치마를 펼쳐놓은 듯 단아하다. 은빛 백사장에는 간밤에 파도가 다녀간 발자국이 또렷이 박혔다. 신선한 아침 아들과 둘이 햇살을 마중 나와 손잡고 백사장을 느긋하게 걸으니 동화 속 백설 공주가 사는 나라에 온 기분이다. 첫 나들이는 큰아들 인솔하에 왔었고, 지금은 둘째 아들 가족과 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인지라 지금은 평화롭지만 얼마 가지 않아 태양이 자기만의 색깔을 당당히 펼치면 인파도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세계에서 아름답기가 세 번째 안에 든다는 이곳의 일몰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맞는지 나도 세 번째다. 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가. 올 적마다 환경이 조금씩 변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때가 첫 나들이다. 그때의 과정을 짚어보면 마닐라 공항에서 소형 비행기로 오는 동안 장난감처럼 보이던 세상, 칼리보 공항에 내려 대형버스로 1시간을 정글 숲 비포장 굽은 외길을 달렸다. 울창한 숲이라 좌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산모롱이를 돌 적마다 빵~앙 길게 신호를 보낸다. 기사가 핸들을 좌우로 돌려 좌석에 앉은 우리는 곡예 하듯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숲은 우리가 실내에서 키우는 야자수 나무가 태반이라 그도 반가웠다.

태양 빛이 쏟아지는 정오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산호가 부서진 백사장에는 덩치 큰 서양인이 육중한 몸에 삼각팬티 하나만 입고 의자에 누워 일광욕했다. 비키니 수영복만 입고 활보하는 노랑머리 여인들이 흰 살을 태양 빛에 붉게 태운 모습이 민망해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쩔쩔맸다. 하루를 지나고 나니 낯설기만 하던 그들이 한 폭의 수채화로 보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태양이 하루를 내려놓는 그날의 광경을 나는 감히 이렇게 표현한다. 활활 타는 붉은 불덩이가 바닷물에 몸을 식히려고 옷을 훌훌 벗는 순간 하늘도, 구름도, 너도, 나도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빨갛게 물들였다고. 한 치의 양보도 안 할 것 같던 파란 바닷물까지 정열에 불타는 태양의 벗은 알몸을 품에 안자, 순식간에 늦가을 찬 서리에 언 홍시처럼 너무나 맑고 고운 빛깔로 변했다. 그리고 더 멀리 수평선 붉을 빛은 펄펄 끓는 용광로 불꽃같이 보였다. 우리는 이 열광을 커다란 돛단배에 앉아 부드러운 바람에 온몸을 식히며 노을에 흠뻑 취했었다.

저녁이 되니 몇몇 식당이 식탁을 모래밭으로 옮긴다. 모래를 담은 기름 호롱에 불을 밝혀 준다. 우리는 모래밭에서 저녁을 먹었다. 모래성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사진 촬영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다. 백사장 카페에서 이벤트를 하려고 악기를 설치한다. 색다른 분위기가 더없이 좋아 과일즙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우리를 보고 “오! 코리아”를 외치더니 `사랑해' 노래를 연주한다. 언니와 어깨동무하고 연주에 맞춰 부르니 마이크를 건네준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불렀다. 악단이 흥이 났는지 `만남'을 또 연주한다. 그도 역시 함께 불렀다. 객석에서 한국말로 노래가 퍼지자, 관객이 몰려든다.

새벽시장을 직접 봐 현지인에게 요리를 부탁해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고, 바다낚시를 해 직접 배 위에서 회를 떠먹기도 했었다. 요즘은 새벽 시장도 낚시 도구도 팔지 않는다. 백사장에 의자가 없으니, 한낮에 일광욕하는 서양인도 백사장에서 마사지 받는 이도 보이지 않는다. 휴양지니 말 그대로 쉬었다 가라는가 보다. 프로그램 사라짐을 아쉬워하며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곱고 맑은 바다 위에 형언할 수 없는 옛 감동의 무늬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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