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보고 싶으면 천천히 걸을 것
하늘을 보고 싶으면 천천히 걸을 것
  •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 승인 2023.05.17 17: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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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꽃이 만개한 교정을 거닐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 친구하고 나하고 / 정다웁게 얘기합시다 /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5세 어린이들이 유치원에서 배우는 동요다.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가락은 익숙하여 어렵지 않다.

재미있지 않은가? 5세가 아니라 50세도 옛날옛적에 넘은 나이에 손주들이랑 놀면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교정을 거닐면서 가사를 틀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여 부르다니…. 가사에 집중하면서 나는 반복해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라르고 렌토 아다지오 / 안~단테 안단티노 / 모데라토 알레그레토 / 알레그로 비바체 프레스토”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배웠을 터인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제 음대생이다. 작곡을 하겠다는 사람이 음악 용어를 몰라서 다른 작곡가들이 써 놓은 곡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나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기어이 외워내고야 말리라 결심하면서 꽃이 만개한 교정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닌다.

라르고(Largo), 렌토(Lento), 아다지오(Adagio), 단어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매우 느린 속도로 연주하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다.

가사 말에 맞춰 느리게, 정말 느리게 걸어본다. 멀리서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도란거리다 함께 터트리는 청춘들의 웃음소리가 청딱따구리 소리와 섞이면서 정겹기만 하다.

느리게 걸으니 고목에서 터져 나온 꽃이 보이고, 빗물에 삭은 낡은 벤치가 자기도 좀 봐 달라고 손짓을 한다.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와 그 꼭대기에 얹혀진 까치집도 나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 까치집 너머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아, 저 파아란 하늘! 느리게, 느리게 걸으니 세상에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린다.

안단테(Andante), 안단티노(Andantino), `느리게', `조금 느리게'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andare(걷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걸음걸이의 빠르기'란 의미였다는 것은 이번에야 알았다.

늘 빠르게만 걸으면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안단테와 걸음걸이의 빠르기를 연결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렇게 천천히 걸어도 되는 것을, 왜 그리 총총걸음으로 살아왔을까? 내가 꽃이 아닐진데 꿀벌 한 마리가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를 잠시 탐색하더니 실망한 듯 꽃 무리 속으로 쌩하니 사라진다.

모데라토, 알레그레토, 알레그로, 비바체, 프레스토. 노랫말에 따라 노래도, 걸음도 빠르게 빠르게 해 본다. 걸음을 빨리할수록 주위를 볼 여유가 없다. 넘어지지 않으려니 내디딜 자리를 보아야 하고, 바로 다음 발을 내 딛어야 하니 곁을 볼 여유도 사라져 버린다.

동요 가사를 빠르기말로 바꿔 그 속도에 맞춰 노래를 불러 보면서, 느리게 걸으면 하늘이 보이고, 빨리 걸으면 땅만 보인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정말 실감 나게 느꼈다.

하늘을 보고 싶으면 느리게 느리게 걸을 일이다. 내가 살면서 넘어졌던 순간은 빨리 걸으면서도 하늘을 보려고 안달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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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2023-05-19 12:32:58
우와~ 충청대 만학도 박창호 선생님이다~~~!!!♡
오늘도 기대에 차서 기사를 열어보네요~
언제나 가슴에 잔잔한 울림과 큰 울림을 주시는 박창호 선생님의 글이 감사하기만 하네요~
덕분에 감성 충만한 하루를 시작합니다~^^
비에 젖어 갈라지고 두터워진 벤치가 어디쯤 일까요?
저도 그 길을 걸어보며 꽃도 벌도 만나서 만양 어린아이처럼 콩닥콩닥 장난쳐보고 싶네요~^^
박창호 선생님~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