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길
오월의 길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1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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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오월의 길'은 언제나 심상치 않다. 잎들은 벌써 연둣빛을 지우고 일제히 진초록의 수평으로 뻗어 지상과 경쟁하고 있다. 조금의 햇볕도 놓치지 않으려는 치열한 무성함을 직립의 인간은 그저 `그늘'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 오월의 그늘 길에는 그러나 자리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무수한 생명이 있어, 단 한발자국도 허투루 내디딜 수 없다.

오월의 새벽길에는 인간의 기척을 미리 알고 피하는 숱한 움직임이 있다. 언제나 분주한 개미들의 움직임. 둔치로 뛰어올라 방향을 잃고 앞으로만 펄쩍 뛰는 어린 개구리. 쥐며느리와 털이 복슬복슬한 애벌레.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땅거미. 그리고 흐린 날이면 포장된 길로 기어 나오는 달팽이에 이르기까지 오월의 길은 무수한 생명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조심스럽다.

행여 무심한 인간의 발에 밟혀 비명횡사하는 일이 없도록 발걸음마다 신경을 집중하는 일은 오월의 길이 만들어 주는 또 하나의 신비로운 체험이다. 그렇게 생명을, 자연을 생각하면서 걷는 길은 뿌듯하다.

또 한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는 `오월 그날'이 다시 왔다.

어언 43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그만 놓아줄 때가 되었다거나, 언제까지 `오월'타령으로 과거에 집착해 살 것이냐는 푸념을 마냥 탓할 수만 없을 만큼 세월이 흐르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가 `오월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은 그 때, 그 오월의 길과 광장에 넘쳐흘렀던 `생명'에 대한 소중한 염원을 아직도 가슴에 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3년 전, 그해 `오월의 길'에는 모두가 생명인 사람들로 그득했다. 한 쪽은 맨손으로, 그저 보통사람의 신분으로 `민주주의'와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던 동포였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반공주의'에 맹목화된 인간들이 `오월의 길'에서 절규하던 동포를 `빨갱이'로만 여기던 특수부대의 군인이 마주하고 있었다.

`폭도'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 `광수 1호 2호 3호 등등'으로 왜곡된 명령과 사주, 그리고 거침없이 자행되던 총격과 구타가 난무하던 그 `오월의 길'에 동포는 없었고, 중간지대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해 그 곳에는 `생명'이 깡그리 사라져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역사는 영광과 오욕을 점철하며 43년을 버텨왔고, 그나마 우리는 `오월 그날'을 기억하는 일의 죄의식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맨 몸이거나, 생명을 지켜내려는 자위차원의 응전이 두루 피해자의 처지였음을 인정받는 진화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의 광주는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이기적인 자들의 지역이자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공식 담론 영역에서 국가에 의해 완벽한 내부의 적이 된 것이다. 이처럼 국가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 반공주의와 지역주의 담론을 이용했고, 극단적인 사적 이익 추구로 국가 위기를 초래했다는 만들어진 정보만을 대중에게 부과했다.”<곽송연. 오월의 정치사회학 그날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 中> 오월 그날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일종의 제노사이드라고 진단한다.

철모에 얼룩무늬 군복, 그리고 총을 어깨에 멘 군인이 한 손으로 청년을 잡고 오른 손에 든 커다란 곤봉으로 내리치려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오월 그날'의 잔인무도함을 뒤늦게나마 알게 했다.

`만들어진 적'과, `우리 국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던 시민은 서로가 생명이며, 동포였고, 한반도의 남쪽에 함께 살던 국민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한 사진 속에 피해자의 한 맺힌 원한은 상징적으로 실체적으로 거리낌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진전은 역사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덕분이다. 진실을 감추고 숨어있는 가해자의 처지 또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을 것이다,

극단을 대립했던 가해와 피해의 청년들이 둘 다 무사했다면, 43년이 지난 지금, 살아 온 날들보다 살 수 있는 날이 더 짧을 것이다. 가해자가 스스로 고해할, 그리하여 진정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날도 길게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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