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흔적
지울 수 없는 흔적
  • 정창수 시인
  • 승인 2023.05.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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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정창수 시인
정창수 시인

오랜만에 문학제에 참석했다. 지역에서 4월이면 해온 30회째 행사란다. 그동안 인접한 곳인데도 왜 한 번도 참석해 보지 않았는지. 문학제에서 안면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무영제. 소설가 이무영을 기리는 문학제다.

이무영은 음성읍 석인리 364-1지가 생가로 1908년 1월 14일 출생했다. 석인리에서 당시 중원군 현 충주시 신니면 사립 용명학교를 1920년 3월까지 다녔다. 그 후 1920년 4월부터 1925년 경성 휘문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4년 동안 작가 수업을 받았다.

다음해 6월 나이 18세에 잡지 `조선 문단'에 단편소설 `달순의 출가'로 등단했으며 다음해 `의지할 곳 없는 청춘'과 `폐허의 울음'을 발간 후 일본 작가들의 모임 `20일회'에 참여하다 1929년 귀국하였다.

농민문학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소학교 교원과 잡지사 직원으로 전전하다가 1931년 동아일보사 희곡 현상 공모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33년 2월 `문학타임즈'를 창간했으며 그해 10월 제호를 `조선 문학'으로 바꿔 창간한다.

1935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다가 1939년 퇴사 경기 군포에서 농업을 종사하며 농민문학에 열중하였다.

소설가 이무영의 대표작인 `제1과제1장'을 1939년에 발표하고 `흙의 노예'를 1940년 발표하였다. 1942년 9월부터 조선문인협회 상임 간사 활동을 하면서 일제 체제협력 의도를 본격적으로 표출한다.

1945년 5월까지 그는 작품활동을 통해 일제 침략전쟁과 전사자를 찬양하고, 지원병 징병을 선전, 선동하였고,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선인의 협력을 독려 일제의 전시 식민정책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해군 소령으로 입대해 해군의 정훈교육을 담당하였고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을 맡았다. 1951년 해군 진해통제부 정훈실장으로 승진했으며, 1952년 충무공 동상제작을 지휘하였다.

1953년 2월 대령으로 진급 해군 정훈감에 취임하였고 숙명여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했다. 1954년 서울로 돌아와 국방부 정훈 국장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해군 대령으로 예편 후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 겸 해군 기술연구소 이사직을 수행했다.

1956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28회 국제펜클럽대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같은 해 자유중국 정부 초청으로 한 달간 중국 교육 문화계를 시찰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1960년 4월 21일 향년 50세에 타계하였으며 성북구 창동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해방 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무영, 그러나 지울 수 없는 흔적 1942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30세 중반 일제의 침략전쟁 패전이 임박할 즈음 불행하게도 일제 체제협력에 동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무영제는 타계한 4월 21일에 1994년 음성문화원이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여 열리다가 1998년부터 한국예총 음성지부에서 주관하였다.

2000년에는 동양일보사가 주관하고 음성군이 후원하였으나 이제는 음성군과 예총 관계자는 볼 수 없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만감이 교차하는 현실이 씁쓸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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