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돌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3.05.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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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홀로 여행을 떠나라. 돌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여행의 시간은 비록 짧아도 여행을 품은 인생은 길다.'

김진애 작가의 ≪여행의 시간≫의 한 구절이다. 작가는 도시에서 한 번쯤 길을 잃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낯선 길에서 온전한 자신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잃어봐야 정말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니 역설이다. 정해진 울타리에서 칸트 같은 삶이 루틴인 내게 큰 일침을 준 책이다. 혼자 낯선 곳으로 여행 한 번 떠나보지 않고는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고 말하지 말고 인생에 대한 섣부른 명제도 내리지 말아야 한다.

홀로 여행은 낯선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이 단 한 번도 없고 주체로서의 나로는 20%밖에 살지 못한 미완의 인생이다. 그 상태로 글을 쓰고 책을 여러 권 출간해 세상에 내놓았으니 부끄러운 민낯이다.

작품 속에서 액자 형태로 인용된 파스칼 메르시어의 원작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는 비가 쏟아지는 날, 강의차 학교로 가던 중, 낯선 여자를 통해 인생의 변곡점을 만난다. 단호한 결단 아래 기적 같은 여행이 촉발된다. 초입부터 인용 작품에 묵직하니 붙들렸다.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가 빗속에서 우연히 구해준 여성, 그 여성이 남기고 간 작은 책과 15분 후 떠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 나도 그처럼 다 내려놓고 낯선 곳을 향해 기차에 오를 수 있을까? 그 용기가 부러웠던 시간이다. 내 인생의 변곡점, 내 인생의 리스본은 어디인가? 이 색안경을 대신할 진짜 나만의 안경은 무엇인가?

그레고리우스가 낯선 여자를 통해 자기가 속한 바운더리를 직시하고 익숙한 알 세계를 깨뜨렸다는 것은 큰 용기이다. 따라가 본다.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살아야 할 진짜 내 인생의 참모습일지도.

우선 재량휴업일이 겹친 주말을 이용해 국내 홀로 여행을 결심했다. 딱히 여행 목적지는 없다.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채우고 고동색 표지판이 보이는 곳마다 들러볼 작정이다.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이 함께했던 여행 방식인데 이제는 홀가분히 돌아보며 새로운 눈뜸이 필요하다.

일전에 문학기행 차 들렀던 부여 신동엽 문학관과 부소산성을 염두에 두고 달렸다. 가다가 고동색 표지판이 보이면 들어가는 것으로 하고 자동차 안 음악 볼륨을 높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가 보여 자동차를 주차하고 사당 입구 홍살문 앞에 섰을 무렵 학교에서 문자가 들어온다.

“선생님, 다음 달 출석부 파일 오늘까지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연휴가 길어서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 같네요.”

그레고리우스처럼 나의 리스본을 향해 결정을 내리기엔 아직 미약한 존재이다. 즉시즉시 해결하기, 할 일이 있으면 미루는 성격이 못 되는 터라 유턴 차선으로 이동했다. 버킷리스트(bucket list)로 올려놓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현실로 되는 그날까지 길고 짧은 홀로 여행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몇 달이고 혼자 떠날 그 낯선 순례길을 위하여, 내 인생의 무늬와 나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하기 위하여, 철저히 고독한 홀로 여행을 통한 새로운 눈뜸의 시간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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