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서 보자 했더니
늙어서 보자 했더니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3.05.0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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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가끔, 유한한 존재라는 걸 잊고 산다. 그러다 부고 문자를 받거나 가까운 이가 떠나면 세상 속 나의 부재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없어도 해는 뜨고 세상은 돌아갈 터, 괜스레 허무하고 쓸쓸하고 억울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누구도 영원한 시간 속에 살지 못함에 어린아이가 강제로 엄마 품에서 떨어질 때처럼 몸달고 무섭다. 허드레 인생을 살아낸 것 같아 후회도 밀려온다. 떠날 날을 잡아 놓은 것처럼 부질없이 지나간 날을 반추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원초적인 질문을 나에게 해봐도 분명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생로병사를 어찌 피해 갈 수 있는가.

가족의 밥벌이를 책임지는 가장이 쇠락해져 간다. 덩달아 서울 출입이 잦은 요즘이다.

나에게 서울은 추억이 많은 도시다. 오래전, 직장 따라 사 년 정도 서울에 거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명동이나 남산을 걷거나 종종 버스를 타고 근교 왕릉으로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결혼 전이라 가족에 대한 책임이나 부담감이 없으니 친구와 재잘대는 게 즐거워 어딜 가든지 낯설지 않고 정다웠다.

그러나 많은 세월을 건너 병원이라는 목적지를 두고 다시 가보는 서울은 몹시 복잡하고 낯설고 무겁고 우울하다. 추억을 소환하는 일조차 버겁다.

올해 들어 일이 바빠선지 가장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처방으로는 모든 수치가 하향곡선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한 생명이 노을진 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타는 폐선처럼 위태롭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을 것처럼 호기를 부리고 함부로 부리던 몸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한마디 항거도 못 하고 서두르는 자식 손에 이끌려 담담한 척 검사는 받았어도 의사 앞에 앉아 있는 초라한 뒷모습에는 고독과 우수가 서려 있다. 그토록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나.

이제야 젊은 날의 허랑방탕했던 세월이 후회되는가. 단단한 옹이로 박힌 미움과 원망이 하나의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변하길 바라는 것처럼 눈치를 보다가도 갑자기 예민해져 발끈하는 걸 보면 걱정하는 가족보다 본인은 더욱 황당하고 참담할 터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긴 세월을 살면서 좋았던 날이 몇 날이 될까. 내 의사가 꺾이고 무시 되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싶어 속으로 칼을 갈았었다. `늙으면 보자!' 이제 주름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산 날보다 떠나야 할 날이 훨씬 가깝다. 이제 와 보니 아픈 사람 앞에서는 젊은 날, 쓰디쓴 잔을 마시며 벼리던 날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의 틈새가 갈라진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그도 수많은 생각으로 쓸쓸해질 터다. 자신을 위한 취미생활도 없이 오로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렸으니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검진 결과는 위험선을 넘지 않았으나 방심해서는 안 될 상황이다. 당사자는 물론 온 식구가 함께 신경 써서 가장의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침묵을 깨고 넘어진 김에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다. 가차없이 내 말을 잘라버린다. 할 일이 많은데 무슨 소리냐고 한다.

아직도 기죽은 모습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다. 덕분에 몸은 바빠도 마음은 여유로워야 한다는 군자 君子의 말이 무색하게 나이 들어 생기 없는 몸도 바쁘고 마음은 더욱 바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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