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는 풍경
이사하는 풍경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3.05.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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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낯선 여자 한 분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그녀는 제법 크게 보이는 전기밥솥을 보자기에 싸서 들었다. 밥솥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사를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파트 같은 라인 위층에 리모델링을 하느라 한동안 소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먼저 말을 건넸다. “혹시 14층에 이사 오시나요?” 하고 궁금증에 못 이겨 건넨 말에 그녀는 맞다 며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다.

나도 그랬다. 살면서 이사를 여러 번 하였는데 그때마다 예전에 엄마가 일러 준 대로 밥솥에 쌀과 팥을 담아 제일 먼저 가지고 들어갔다. 엄마는 밥솥이 먼저 집에 들어가야 복이 들어와 잘 산다고 신혼 시절 이사를 자주 하는 딸에게 당부하셨다. 이미 오래전부터 성당을 다니며 미신을 믿지 않겠다고 매번 다짐하고 살았지만, 그 일은 미신 이라기보다 전통적인 풍습이라 스스로 합리화하며 엄마의 당부를 지키며 살았다.

이사하는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이사의 첫 기억은 일곱 살 때이다. 우리 집은 면 소재지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깊은 골짜기에 살다가 학교가 있고 면사무소가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열 명이 넘는 대식구의 살림살이와 농사에 필요한 씨앗이나 농기구들을 동네 사람들이 지게로 지거나 소달구지를 이용해 나르곤 했다. 떠나오는 동네 사람들과 이사 들어가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내 일처럼 짐을 날라주었다.

아마도 그게 집들이였나보다. 이삿짐을 나르느라 발 벗고 나서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날이었다. 할머니, 엄마, 작은엄마, 고모까지 분주히 부엌을 들락거리며 음식상을 차렸다. 붉은 팥죽에 찰밥, 살얼음 서걱서걱하는 동치미를 먹으며 안방 사랑방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금새 낯선 사람들이 이웃으로 가까워졌다. 집 집마다 빨랫비누 한 장, 성냥 한 곽씩 손에 들고 와 수줍게 놓고는 살림이 불처럼 일어나라 기원해주었다.

우리가 첫 집을 장만했을 때도 많은 이들 도움을 받았다. 고층아파트로 이사를 하는데 하필 이사하는 날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었다. 13층을 오르내리며 짐을 날라주었다. 같은 통로에 이사 들어온 집마다 팥시루떡 접시를 돌리고 육개장을 끓여서 이삿짐을 날라준 지인들에게 대접했다. 두루마리 휴지와 가루비누를 사 와서 축하의 말을 전하고 부자 되라며 복을 빌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집에서 아이들 잘 키우고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이즈음에 이사는 편하지만 좀 삭막하다. 이사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업체에서 전반적인 이삿짐은 옮겨 정리를 해주니 예전 이사에 비하면 편하기는 그만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같은 아파트 위아래 사는 것도 예사 인연이 아닐진대 여간해서 서로 왕래할 일이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웃으며 짤막한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이웃이다. 이사를 온 그녀도 무탈하게 즐거움 누리며 새로운 집에서 평안했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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