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군 자리, 시작을 품고 있다
떨군 자리, 시작을 품고 있다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3.04.1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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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꽃이 지고 있다. 무채색이던 겨울 끝자락에 화사함을 더해 한 시절을 찬란하게 했던 봄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어느 해는 몇 날 며칠 빛깔을 발하고 있으나 어느 해는 무심히 솨라락 떨어지는 통에 아쉬움을 갖게 한다. 햇살, 기온과 습도 등 자연환경이 나무에 영향을 주기에 그러리라.

아쉬움 잠시라도 붙잡으려 체험관 마당에 핀 복사꽃 몇 송이 안내대 위로 들여놓으신 스님의 얼굴에 미소 가득하다. 애쓴 공도 잊은 채 꽃잎 후두둑 떨어진다. 허나 그 꽃잎 떨군 자리 허망하지 않단다. 남아있는 수술은 다른 모양과 색으로 자리를 지키며 씨앗을 감싸고 있기에 그렇단다.

꽃과는, 이전과는 사뭇 다를 시간을 보낼 열매의 시작을 품고 있는 것을 보셨기에 그렇다.

우리네 시간도 그렇다.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던 현업에서 물러나야 하는 때가 있다. 꽃잎을 떨궈야 하는 이른바 `은퇴'라 하는 시기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인 요즘, 보편적으로 60세 전후로 은퇴를 맞이하니 40여 년은 너끈히 보낼 각오도 해야 한다. 꽃잎을 떨군 그 자리, 자식과 가정이라는 열매가 아닌 오롯이 나의 열매를 키워낼 씨앗을 품어야 한단 얘기다.

다행히도 다양한 과정을 접할 기회를 공공기관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다. 투박한 손으로 요리 도구와 다기 다루는 시간을 갖는 이도 있고, 팔랑이는 가녀린 몸으로 라인 댄스 자격증 취득을 위해 스텝을 밟는 이도 있는가 하면, 돋보기를 코에 걸고 글자와 씨름하는 이도 있다. 꽃잎 떨군 자리에 있는, 여태 외면했던 품고 있던 씨앗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다.

씨앗 지켜 열매로 키우는 그 시간, 겨우내 추위와 바람 성성한 중에 꽃눈 지키느라 애쓴 만큼 녹록지 않음은 매한가지리라.

시 그림책 <대추 한 알/장석주 시/유리 그림/이야기꽃>에서도 보면 대추가 익기까지는 천둥과 벼락을 견뎌내야 하고 일정량의 땡볕이 필요하며 초승달 몇 낱 봐야 할 정도의 시간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말한다. 설사 그런들 어떠랴!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어여 어여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감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을!

`꿈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나이가 든다'란 말이 있다.(미국 배우 존 베리모어) 요즘 은퇴를 맞는 이들 대다수는 어렸을 적 꿈의 자리에 가족이라는 둥지를 들여놔야 했다.

맏이를 위해, 아들을 위해 그 자리는 돌 볼 수 없는 곳이었다. 내 자리이기는 하나 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그 자리에는 후회가 들어섰으리라.

꽃잎 떨군 그 자리, 이제라도 후회를 비집고 희망을 들이기 위해 한 발 내디딘 이들에게는 꽃잎 떨군 그 자리가 허망하지 않을 것이다.

시작을 품고 있는 씨앗이 있는 걸 봤으니 말이다. 희망은 태풍도 이겨내고 무서리 내리는 몇 밤을 견뎌낼 힘을 돋우게도 한다.

비록 서툴고 느리고 귀퉁이에 흠집이 있는 희망이지만 무늬와 빛깔로 자국을 남기고 고유한 향과 맛을 담고 있는 나만의 열매를 가꾸기에 충분함에 마음을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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