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다
익숙해지다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3.04.0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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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세월의 변화에 따라 감정이라는 것도 조금씩 둔화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 시기적절한 눈물은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민망함까지 생겨난다.

그러나 눈물만큼이나 깊은 생각들로 다시 바라보아야 할 현실에 마음 추스르며 살아갈 방향을 찾느라 분주하다.

영원이라는 언어의 의미가 이제는 낯설기만 하다.

삶 속에서 또는 마음속에서 부동일 것 같은 모습들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을 비롯해서 형제조차 한둘씩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슬픔인지 체념인지 무게를 가늠치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야 만 것이다.

수많은 독백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느 누구에게든 항상 가까이 머문다는 사실로 답을 내렸다.

코로나가 엄습한 지난 시간은 사방이 막힌 담과도 같았다. 혈육인 언니가 병원에 입원했어도 면회 한 번 제대로 갈 수 없었던 처지가 애석할 뿐이었다.

끝내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과 가까이해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으니 어쩌면 좋을까.

안타까운 눈물은 나도 모르게 짧아졌고 서로간의 정서도 희미한 기억들뿐이니 형제일지언정 그만큼 세월이란 간격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이별에 마음이 단단해져 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떠나는 인연이 혈육 뿐만은 아니었다.

부모 밑에서 자라고 성장하기까지 죽음은 아주 하늘만큼이나 거리가 먼 줄 알았었다.

차츰 나이를 더하고 노년이라는 문턱에 이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별에 젖어 갈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삶의 흐름에 메마름이 쌓여간 감정 탓인지도 모르지만 비로소 오늘에 이르러서야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니 늦은 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별의 모양이 편하고 개운한 것은 없으리라 여긴다. 아마 개개인마다의 사정도 다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받아들여 가는 과정과 속도인 것 같다. 어떤 인연이라 해도 세상 끝에서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요즘 들어 피부로 더욱 체감하게 되면서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되뇌며 감사를 아끼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본다.

한겨울이 지나면서 땅은 다시 숨을 쉬느라 바쁘다. 나뭇가지에서조차 용트림이 배어 나와 몸짓을 키워내고 있다.

그 풍경들이 생명에 대해 경건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여전한 것은 사람들의 움직임도 함께였다. 시간은 가고 다시 온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황이다. 익숙함이란 이렇듯 가까이에서 마음의 눈을 열도록 하며 일어서게 만들어 놓으니 살아갈 이유를 다시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별의 종류도 들여다볼수록 다양하다.

이제 외형이 다른 경우에 닿더라도 냉랭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면 한다.

내일이 마지막일지언정 슬픈 이별에는 딛고 극복하려는 자세, 기쁜 만남에는 갑절로 승화시켜 삶의 이유를 늘여가도록 하는 자세, 하루를 살아도 그렇게 평안하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무수하다. 아니 잃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 중요한지를 꼽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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