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와 날파리
모기와 날파리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3.04.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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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오랜만에 지인들과 바람 쐬러 나왔다. 거금도, 소록도, 나로도를 돌아 보성, 율포에서 묵고 돌아갈 예정이다. 부드러운 남도(南島) 바람과 옥빛 도는 파스텔톤의 봄 바다가 포근하게 다가온다. 시야가 확 트이고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다.

지난 몇 달간 의기소침했다. 부쩍 눈이 뻑뻑한 게 쉽게 피곤해지고, 눈 속에 뭔가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특히 책을 읽을 땐 증세가 심해서, 재를 뿌린 듯 시야를 방해하는 점들과 어른거리는 어떤 형체들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아 안과에 갔더니 안구건조증과 비문증(飛蚊症)이란다. 다행히 안구건조증은 눈 운동하고 인공눈물을 쓰면 좋아질 거라는데, 비문증은 치료법이 없다 했다. 노화 현상이라 무리가 가지 않게 잘 관리하면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노화 현상이 어디 눈뿐이겠는가. 피부는 늘어져 주름지고, 어깨와 무릎 관절도 이미 한 번씩 고장이 났었고, 흰머리에, 머리카락도 자꾸 빠지고 힘없이 들러붙어 초라하기 그지없다.

기억력도 깜빡깜빡, 사실 책을 읽어도 내용이 단번에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익숙해지는 일밖에는 답이 없다니, 그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 앞에서 불완전한 한 인간으로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알지만 늙음을 인정한다는 게 너무 슬프고 우울했던 것 같다.

고민하던 내게 언젠가 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기는 `초록초록' 잔디를 보면 좋아지더라며 자연을 많이 접해보라고 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다의 `파랑파랑'을 보니까 증세가 확실히 나아진 듯하다. 일시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 심해지진 않을 테니 괜찮은 처방 같다. 비문증이 심해지면 실명할 수도 있다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야외로 나가 `분홍분홍' 꽃도 보고, `푸릇푸릇' 숲과 나무를 마주해야겠다.

아직은 읽을 책도 많고 그림도 더 그리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년에 손주가 태어나면 그 맑은 눈망울에 비친 하늘을 꼭 보고 싶다. 또 봄이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벚꽃 봉오리 앞에서 수줍은 듯 덩달아 설레 보는 소소한 행복도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계절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하늘색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첩첩 산들의 수묵화 같은 풍경도 오래도록 봐야 하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비문증과 친해져 보기로 했다. 모기 문(蚊)자를 쓴 걸 보면 모기 모양의 티가 날아다닌다는 건가? 일명 날파리증이라고도 한다니 일단 모기인지 날파리인지 실체부터 확인해야겠다. 침대에 누워 흰 천정을 배경으로 눈동자를 굴려본다. 그런데 정확히 쳐다보려고 하면 그때마다 어느결에 꼭 그만큼을 비켜 가곤 하는 것이다.

살금살금 따라가면 살금살금 달아나고, 휙휙 쫓아가면 휙휙 도망간다. 한참을 시도해본 끝에 겨우 얻은 결론이 모기인지 날파리인지 못 봤다는 것, 그리고 뭐가 됐든 절대 따돌리거나 벗어날 순 없다는 사실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내 눈 속에 날아다니는 게 뭐든 무슨 상관이랴.

평생을 같이 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련다. 모기라면 늘 예리하게 깨어 있도록 도와줄 테고, 날파리라면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키워줄 것이다.

또 한 가지, 어쨌든 나이 들어가면서 마음 수양하는데 필요한 장치 하나는 확실히 생긴 셈이다. 점점 지적질이 심해진다는 남편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남의 티를 보자면 무조건 내 눈의 들보부터 보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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