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언니를 생각하다
봄에 언니를 생각하다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3.04.0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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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어릴 적, 내 꿈 중의 하나는 ‘언니’였다. 언니가 되는 게 아니라 (난 맏이였으므로) ‘언니’라고 부를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교회에서 있지도 않은 온갖 아양으로 ‘언니’를 만들었다. 언니와 인형 놀이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도 ‘좋은 언니’가 되겠다는 제법 기특한 생각도 했다. 특히 언니와 둘이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좋아했다. 갈림길에서 집에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다정한 말은 내가 이 말을 듣고 싶어 오늘을 살았나 싶은 정도로 좋았다. 이후에 수많은 여성 선배를 만났다. 나의 중성적인 성향 때문인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같은 성性을 가진 여성에게 관심이 생기고 그녀의 스타일이나 생각을 따라 하기도 했다. (물론, 나의 정체성은 여성!) 살아오면서 몇몇 정말 좋은 언니, 괜찮은 인생 여성 선배를 만나기도 했다. 
 
벚꽃이 피기엔 바람이 살짝 쌀쌀하지만 햇볕은 좋아 오염 안 된 들판에 어린 쑥을 재미 삼아 뜯기 좋은 어느 주말, 경기도 여주에 있는 ‘여백서원如白書院’에 가자는 착한 언니 제안에 지인 세 명이 따라나섰다. 방송을 통해 전영애 교수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괴테연구가로 서울대를 은퇴하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에 그의 호를 붙인如白 서원을 지어 대중에게 개방한 멋진 여성(언니)이었다. 여백서원에 가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요즘 들어 움직이려 하지 않는 몸과 영혼을 일으키기엔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혼자 신음만 뱉어내던 하루하루여서 언니의 봄처럼 상큼 달달한 제안은 정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운전을 자처했다. 그만큼 설ㅤㄹㅔㅆ기 때문일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내 입에 간식을 넣어주는 언니의 말을 들으며 가는 멀지 않은 여행길은 뭔가 뿌듯하고 언니만큼 나도 어른이 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나의 어리광이다.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산책길을 걸으며 나무 밑에 써놓은 괴테 문학의 좋은 글을 소리 내어 서로 읽는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표지석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방송에서 전영애 교수는 이 말을 두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모로 가도 서울 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라면서 과정의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함께한 언니와 닮은 구석이 있는 글귀다. 언니도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정성을 다한다. 병원에 입원하는 모든 인격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이주노동자도 언니를 좋은 간호사로 기억한다. 돌아가신 시모님을 모시는 것은 옆에서 봐왔기에 두말하면 입 아프다.
 
나는 맏이로 자라면서 많은 것을 누렸다. 첫째라는 권력은 은근히 누릴만한 것이어서 언제나 새것은 내 차지였고 동생은 내복까지 내가 입던 것을 물려 입었다. 좋은 언니가 되고 싶어 철이든 지금에 노력하고 있지만 입지 않은 옷을 입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좋은 언니를 보니 또 다른 좋은 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이 호랑이 힘처럼 솟아난다. 서원에 찾아와 짧은 강연을 들었던 수십 명의 언니와 그녀들 앞에서 자신의 길을 담담히 풀어낸 72세 언니, 누군가의 언니고 누군가를 ‘언니’라고 부른 여성들. 어쩌면 삶은 동생으로 태어나 언니를 동경하다 좋은 언니로 마무리되는 듯하다.
 
햇살 한 줌도 놓치지 않고 그것에 기대어 차분히 일어나는 봄은 우리 곁의 많은 여성을 닮았다. 생의 과정까지 귀하게 안고 가는 사람들, 주위에 닮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언니들이 생각난다. 춥고 오그라드는 계절을 이기고 분연奮然히 차오르는 봄은 어릴 적 그날, 날 위해 종이 인형을 만들어주던 언니처럼 착하고 바르고 섬세한 가위질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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