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다시 쓰자
마스크를 다시 쓰자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3.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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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다섯 살, 일곱 살, 두 손녀딸이 싸우는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의 대부분은 다섯 살짜리의 심술로부터 시작된다. 언니가 그려놓은 그림을 찢고, 애써 만든 아이클레이 작품을 찍어 누르고, 공부하는 책상을 휘저어 놓는다.

다섯 살짜리에게도 이유는 있다. 저는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데 언니는 척척 해 내는 것이다. 식구들의 칭찬을 듬뿍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멋짐을 과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기를 은근히 조롱하거나 무시하기도 하니 그 조그만 속이 부아가 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앞에서 언니가 너무 잘난 척을 한다는 것이다.

일곱 살짜리는 또 억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잘 한 것을 엄마 아빠한테 자랑했을 뿐인데, 동생한테 너보다 내가 잘한다는 사실을 보여줬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테러에 가까운 심술을 당할 일이냐는 것이다.

정년퇴임한 남편은 주민자치센터로 기타를 배우러 다닌다. 늦은 나이에 악기를 배우려니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손가락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지, 배워야할 이론은 많지, 조급증이 생기는데 함께 수강하는 사람 중에는 실력자들도 있어서 기가 죽는 모양이다. “잘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나와서 사람 기를 죽이는 거야.” 하면서 실력자들을 원망하니 말이다. 다섯 살 손녀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못하는 걸 잘하는 언니가 야속했을 것이다.

내게는 이모님이 한 분 계시다. 지혜롭고 사려 깊어서 주변을 잘 다독이는 분이다. 운명의 신은 때론 가혹해서 그 이모님에게 많은 어려움이 생겼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이모부를 긴 세월 돌보아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장성한 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내는 단장의 아픔을 겪어야했다. 그 이후로 이모님은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어려워하신다. 그들이 하는 남편자랑 자식자랑을 듣고 있기가 버겁다는 것이다. 웃으며 들어주지만 마음이 허허롭다는 것이다.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쩌다 생긴 자랑거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비난할 수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를 보아가며 해야 하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 앞에서 산해진미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본인은 맛있는 걸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인데 배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이 고문일 수도 있다. 나의 배부름이 배고픈 사람에게는 더 큰 허기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 하나는 아들이 좋은 학교를 가도, 대기업에 합격을 해도 제 입으로 그것에 대해 요란스레 말하지 않았다. 자랑삼아 얘기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 마음이 배려인 줄 알기에 존경할만한 친구다. 무언가를 베풀어야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열등감을 부추기지만 않아도 그 사람은 이미 좋은 사람이다.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니라 비교라고 하지 않는가.

나도 입이 가벼운 사람이라 좋은 일이 생기면 얘기가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댄다. 가벼운 입놀림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도 있었을 것이다. 내 자랑거리라야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큰 상실감을 줄만한 것은 아니라고 발 뼘을 해보지만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임을 안다.

갖가지 삶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다. 기쁜 이도 있고, 슬픈 이도 있는 세상이다. 이 공평치 못한 세상에서 나의 기쁨이 누군가의 상실이 되지 않도록 KF94마스크를 벗어낸 자리에 배려의 마스크를 다시 쓰는 건 어떨까하는 제안을 해본다. 자만과 자랑의 말을 걸러주는, 쓰면 쓸수록 향기 나는 마스크 말이다. 지금 당장 써서 오랜 시간 벗지 않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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