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오래전의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3.03.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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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이세 히데코 글·그림/청어람미디어'란 그림책이 있다. `를리외르' 생소한 단어다. 아저씨 앞에 쓰여 있으니 사람 이름이지 싶으나 직업을 이르는 명사이다. 프랑스어인 를리외르Relieur는 제본공이란 뜻을 가진 단어지만 통념적으로 단지 책을 묶는 일만을 일컫지 않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제본가'라 번역하여 부르고 있다.

집에 두고 대를 물려 보거나 종이가 닳도록 애장하며 보는 책은 아무리 튼튼하게 장정했다 하더라도 제본실이 끊어지고 종이가 해지는 등의 상처가 생겨 책의 기능을 다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림책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속 주인공인 소피, 나무를 좋아하기에 식물도감을 수시로 펴 보며 알아간다. 뭐든지 알려주는 소피의 책인 식물도감은 손길이 닿은 만큼 낡아져 솨라락 흩어져 떨어진다. 새로 나온 책으로 다시 살 수도 있지만 망가진 책을 고치고 싶은, 탐구력 넘치는 소피는 책 고치는 곳을 찾아 나선다.

사람도 상처를 입는다. 몸에도, 마음에도 수많은 상처를 입는다. 나에게 온 상처를 대하는 태도 또한 천차만별이다. 없었던 듯 잊고 살기, 아무 일도 아닌 양 묻고 살기, 상대방에게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해를 가하며 되갚아 주기 등 다양하다. 그중 최선의 방향은 가해자에게서 사과를 받는 것이라 한다. 그때 당시를 시간별로 혹은 사건 별로 쪼개고 쪼개 자세히 되새겨 들여다보고 상처의 크기를 알고, 시인하고 공감해야 나올 수 있는 것, 그것이 사과이기에 그럴 것이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기에 그럴 것이다.

이렇듯 상처 치료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헤집는 일이다. 낱낱이 해체해야 상처의 깊이를 알고 치료의 방법을 다각도로 방구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 과정은 같은 사건을 다시 겪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잊은 척, 없었던 척하며 회피를 최선책으로 삼는다. 내적 가학임을 모른 채 말이다. 거기에 더해 `당할 만하니 당한 것'이라며 가해자 입장의 잣대로 바라보며 질책하는 외적인 아픔까지 겪어야 한다. 그럴수록 자존감, 인간이 갖는 존엄성은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고 불안은 커진다. 사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논리다.

`책에는 귀중한 지식과 이야기와 인생과 역사가 빼곡히 들어 있단다. 이것들을 잊지 않도록 미래로 전해주는 것이 를리외르의 일이란다.'라는 를리외르 아저씨의 말에서 보듯 책의 가치를 알고 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예술제본의 시작이다.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상처를 덮기만 하는 겉치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분해해서 다시 꿰매고 표지를 장식해서 아름답게 하는 미학적 기능뿐 아니라 오랜 시간 책으로써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하는 보존적 기능에 중점을 두는 것이 를리외르의 사명감이다.

나무를 사랑하는 소녀 소피와 낡은 책을 보수한 뒤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를리외르 아저씨와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낡고 해진 종이에서 사람의 상처를 보고, 한 장 한 장 분해하고 보수해서 다시 꿰매고 그에 걸맞게 표지를 장식하는 작업에서 가치를 찾는 자세를 본다. 책이든 사람이든 고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작업은, 상처를 보듬는 손길은 아픔을 딛고 설 용기와 힘을, 개인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봄꽃처럼 찬란한 오늘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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