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었다
백수가 되었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3.2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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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누가 그랬을까. 어쩌면 이리도 많이 쌓아두었을까. 저토록 엄청날 수 있을까. 꺼내도 꺼내도 끝이 날 줄 모른다. 냉장고가 양을 불리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련만 놀랍다. 684℃ 냉장고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이게 다 들어가 있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사태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무엇인지도 모를 비닐 뭉치가 여기저기서 삐져나오고 있다. 차로 5분 거리에 마트가 있는데 왜 그리 쟁여놓았는지. 꽝꽝 언 고기는 냄새가 나고 맛도 없다. 그걸 알면서 웬 욕심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먹어야지 미뤄 두었던 음식들을 과감히 버린다. 찌개를 끓이려 했던 해묵은 김치들을 쓰레기에 쏟는다. 너무 깊숙이 들어 있어 잊고 있던 나물은 쉰내를 풀풀 낸다. 울컥 비위가 상한다. 봉투가 금방 찬다. 설거짓거리가 넘쳐나도 기분은 좋다. 냉장고가 헐렁해질수록 살 것만 같다.

그릇도 갈아주지 않아 엉망이다. 냄비는 그을려 얼룩얼룩하다. 바닥의 코팅이 벗겨지면 건강에도 해로움을 잘 안다. 그래도 바꾸지 못한 핑계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다고 둘러댄다. 시간이 나를 옭아매어 현실에 안주하도록 했다. 나를 미개인으로 만들었다. 아무도 우리 집에 와서 살림 꼴을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3월에 백수가 되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이 지저분한 집꼴이었다. 신경이 거슬려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느 구석 하나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 전부터 냉장고를 열 때마다 숨이 막혔다.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남의 굿 보듯 한 게 원인이다. 휴일에는 볼일을 보러 다니랴, 쉴 욕심에 수박 겉핥기의 반복이 된 탓이다. 오랜 시간이 빚어낸 게으름의 결과다. 냉장고를 비우고 나니 나도 숨이 편해진다.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알았다. 내 속 안에도 버려야만 할 감정들을 쌓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움이 곰팡이가 피어 온몸에 악취를 풍기고 있다. 무슨 미련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케케묵어 썩도록 원망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안에서 독소를 내뿜는 감정들을 정리한다. 주저하지 않고 버리고 이해로 받아들여야 그 자리에 새로운 감정들이 자리하는 법이다. 사랑, 행복, 믿음.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제 보니 나는 백수가 체질이다. 헐거워질세라 조여 대던 마음의 나사도 느슨하게 풀어진다. 늘 나를 긴장하게 하고 옥죄이던 구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본다. 묵은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나는 자유인이 된다.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백수가 되어서야 내면의 나로 귀환한다. 지금껏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되어 사는 느낌이었다. 보지 못했던, 가까이에서도 느끼지 못한 관계 온도를 절감한다. 사람들이 멀리서 다가오고 소원해진 이들이 가까워진다. 사람이 나에게 오고 있다. 감사와 은혜가 함께 온다. 이어 뭉클한 사랑도 올 것이다.

30년. 할 만큼 일을 했으니 제대로 즐길 요량이다. 그이가 아파 앞당긴 백수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직장에서 제약을 받아 진료일마다 같이 가주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병원에 다니고 아픔을 나눌 수 있어 좋다.

마술은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마음이 지옥을 만들 수도, 천국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우리가 맞는 계절도 찬란할 것이라고. 긍정의 힘은 막 눈을 뜬 봄처럼 희망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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