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의 표정을 보았네
뒷모습의 표정을 보았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3.09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1월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났다. 소한의 추위에 실내에서도 시린 손을 달래느라 핫팩을 움켜쥔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는 얇은 봄옷을 입고 있었다. 초췌한 얼굴이 더 추워 보였다. 내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거기에 피가 묻어있고 손을 싸맨 헝겊이 온통 빨갛다. 그걸 받아 든 순간 어질하니 현기증이 났다. 등기를 접수하면서 걱정되어 조심스레 물었다.

훌훌히 나의 궁금증을 말해주었다. 칼에 베인 손이 피가 멈추지 않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말에 기함했다. 이유가 돈이 없어서 못 갔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나. 얼른 만원을 들려주며 병원에 가라고 당부했다. 동정이 아니라 이러다 큰일 나지 싶어 겁이 났다.

나는 피만 보아도 무섭다. 사랑니를 뺀 후 피가 멈추지 않아 공포로 밤을 새운 적이 있다. 엄마가 새벽에 십리를 걸어서 약국 문을 두들겨 사 온 약으로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 기억은 내내 두려움으로 남아있다. 만원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씩 하고 간다. 짠했다.

얼마 후에 와서 거즈로 감싼 손을 내보이며 웃는다. 맑은 표정이 마스크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내 나이와 엇비슷해 보이는 얼굴에서 도무지 나올 수 없는 표정에 반했다. 쉰을 넘겨 보이는 그녀에게서 순수함을 본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마도 욕심 없는 마음이 표정에 우러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꾸만 감사의 인사를 한다. 얼마나 깍듯한지 면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가 며칠 동안 밟혔다. 잊힐 때쯤 다시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결코 받을 생각이 없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자 더 바짝 들이밀었다. 어쩌지 못해 돈을 받자 고마웠다는 말을 하곤 돌아선다. 그녀가 사라지는 사이 기다리는 손님들이 줄을 섰다.

이제는 짠하지 않았다. 뒷모습이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 그날,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떳떳해진 자신에게서 저절로 나온 모습이리라. 그녀는 딱 세 번째 만남에서 내게 속을 들켜버렸다. 그래도 당당함을 보아서 다행이다. 그 모습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오늘, 나는 명퇴를 했다. 30년 3개월을 보낸 우체국의 시간을 매듭지었다. 3년을 남기고 한 선택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쉬움이 남을 때가 가장 좋을 때라고 하지 않는가. 섭섭하냐는 이들의 물음에 시원하다는 답을 준다. 홀연, 이즈음에 그녀의 뒷모습이 클로즈업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나는 어떨까. 내가 떠난 뒤에 남겨진 발자국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이 볼 수 없는, 다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모습. 부정할 수 없는 내가 살아온 진짜 내 모습의, 내가 보지 못한 나. 그게 나의 뒷모습이다. 스스로 잘 살았다고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다. 소망하건대 겉과 속, 머문 자리와 떠난 자리가 한결같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사로운 봄날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꼬옥 팔장을 끼고 아장아장 걸어간다” 올해의 봄편으로 김선태 시인의 단짝을 내건 교보생명의 광화문 글판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걸어간 뒤로 발자국이 남고 그곳에서 꽃이 피어나는 그림에서 새봄이 내 안에도 왔음을 느낀다.

벌써부터 아들은 내일부터 무얼 할 건지 닦달하고 있다. 일에서 손을 놓고 우울해할까 봐 염려스러운가 보다.

`아들아, 잠시 숨을 돌리고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쉬다 보면 또 다른 내가 꿈꾸어지지 않겠니. 엄마는 단짝을 본 순간 이미 앞날이 설렌단다. 내 눈에는 막 피어나는 봄꽃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것처럼 보이거든. 제2의 내 인생을 응원하듯이 말이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