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게 듣는 가을 이야기
바람에게 듣는 가을 이야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1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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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발언대
김 설 영 <청원군 남일초등학교 교사>

가을 바람이 맛있다.

한 입 베어 물면 금방이라도 단물이 입 안 가득 고일 것 같은 포도알처럼 달콤하다.

가을 앞에서 바람은 더욱 싱싱하다.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제주도 은갈치처럼 쉴새없이 파닥거린다.

가을 바람은 쉬지 않고 달린다. 바람이 달릴 때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긴 머리 정이의 생머리가 달린다.

길 가의 코스모스도 바람의 손을 잡고 달린다. 장승처럼 서 있기만 하던 미루나무 꼭대기도 달린다.

바람이 교문을 열고 걸어 들어온다. 운동장 가득 바람이 온다. 땀을 닦아내며 달려온다.

교정을 가로질러 달려온 바람과 방학 동안 시간표 안에서만 축구를 하던 체육시간이 2학년 참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축구 시합을 한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시작을 알리자마자 바람이 먼저 공을 몰았다.

바람은 요리조리 왔다갔다 공을 살살 굴리더니 우리 반 축구 골대 앞으로 쏜살같이 휘몰아친다. 아이들은 질세라 더 거센 속력으로 공을 낚아챈다.

바람은 아이들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하늘을 가르고, 하늘을 뒤집더니, 하늘까지 '뻥'하고 차 버렸다.

"참반, 이겨라!", "바람, 이겨라!"

힘찬 응원 소리가 축구를 한다. 우리들 함성 소리가 축구를 한다. 이마의 땀방울이 축구를 한다. 이기려는 안절부절 못한 마음이 축구를 한다.

"우리 편아, 잘해라.", "저쪽 편도, 잘해라."

잔디 구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달려오는 바람, 그만 축구골대 앞에서 연섭이의 다리를 걸고 넘어졌다. 연섭이의 하얀 무릎에서 새빨간 꽃물이 흘러 내렸다. 마치 가을 하늘의 빨간 칸나꽃처럼 마구 피어올랐다.

'으앙∼'하는 울음 소리와 함께 경기는 끝이 났다. 가을 햇살이 살며시 내려와 연섭이의 손을 꼭 잡고 따뜻하게 위로해 줬다. 서로 잡은 두 손 사이로 빠끔히 고개 내민 들꽃 향기도 한참을 우리 곁에서 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

울타리 나팔꽃이 몸을 비비꼬며 하늘 겨드랑이를 간지른다. 하늘은 웃음을 참지 못해 활짝 웃었다.

연섭이 얼굴에도 가을이 활짝 피었다.

모두가 집으로 간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서 송골송골 영근 우리들 꿈은 가지 않고 밤하늘에 함초롬히 매달려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밤에 환희 빛나는가 보다. 남들이 다 자는 한 밤중에 더 반짝거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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