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을 태엽 어찌할까
내 안에 있을 태엽 어찌할까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3.03.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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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태엽(胎葉)이라는 것이 있다. 얇고 긴 띠 모양의 강철을 소용돌이처럼 말아주는 장치를 말한다. 인위적인 힘으로 인해 동그랗게 말린 강철은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는데 그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시계나 작은 장난감을 움직이게 하는 기계장치다.

어릴 적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한 달에 한 번, 손목시계는 매일 밥을 준다며 태엽을 감았던 기억이 있다. 이 태엽이란 것이 풀리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 끝까지 감고 난 직후에는 안고 있는 힘이 많은 상태라 빠르고 힘있게 풀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을 잃어 느려진다. 태엽을 정기적으로 감아주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거다.

`태엽 아이'(글·그림 유명금/책고래는 태엽의 이런 원리를 지금의 사회현상에 빗댄 그림책이다. 뭐든 빨리빨리 잘하고 싶어 매일 아침 태엽을 감고 또 감는, 태엽을 등에 달고 사는 아이에 대한 그림책이다.

태엽 아이는 뭐든지 다른 아이보다 훨씬 빠르게 잘하고 싶기에 태엽이 조금만 풀려도 얼른 끝까지 다시 감는다. 태엽 아이는 “빨리 가야 이기잖아. 이겨야 재미있어!”라며 온몸이 조여오도록 태엽을 감는 이유를 말한다.

경쟁 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의 현재를 고스란히 이르는 작가의 메시지이다.

어릴 적부터 수많은 상대와 경쟁해서 이겨야 칭찬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일에서든 척척 해내야 할 뿐 아니라 빠르게 성과까지 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칭찬은 인정 욕구를 부추기고 인정은 존재감을 확인하는 잘못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 뒤처질까 불안한 마음에 어른들은 아이에게 태엽을 달아주고 태엽 감는 법을 먼저 알려준다. 쉬는 것, 노는 것도 태엽의 굴레 안에서 해야 한다. 조이고 또 조여 힘을 만들어 가며 태엽을 끝까지 감고 또 감아 끊어질 지경까지 이르던 태엽 아이에게도 경쟁은 짐이 되는 요인이었다.

위태롭게 빨리 앞을 향해 달리던 태엽 아이에게 아직 태엽을 달지 않은 꼬마가 던진 말 한마디! `나는 빨라도 재미있고, 안 빨라도 재미있어. 이겨도 재미있고, 져도 재미있어'라는 말은 태엽 아이의 앞날을 바꾼다.

`태엽을 감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태엽 없이도 괜찮을까?' 씨앗으로 들어온 말이 싹을 틔워 슬그머니 태엽을 떼는 힘이 되었다. 천천히 다르게, 그리고 느리더라도 즐겁게 사는 삶으로 가는 변환점이 되었다.

그렇다고 태엽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등에도 태엽은 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나를 있게 하는 가족, 내가 져야 하는 의무, 내가 속해 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은 내 등에 꽂혀있는 태엽을 감는 힘과 추진력으로 작동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그 요인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지만 나의 온몸을 조이며 세상으로 떠미는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함께 해야 할, 내 등에 있는 태엽! 나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인 태엽을 다는 것도, 떼어내는 것도,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나'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해 보면 어떨까?

지치고 힘들 땐 태엽의 힘을 빌려 앞으로 나아가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땐 산과 들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도록 속도를 낮춰보고, 죽을 만큼 힘들 땐 태엽을 떼어내고 편안한 하루를 보낼 용기를 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빨리 어디를 가는데?, 왜 빨리 가야 하는데?'라고 묻던 꼬마의 질문! 어느 한 줄 글, 어느 선인의 말, 어느 대중의 행동에서 씨앗을 받아 자문자답하며 누군가의 힘이 아닌 나만의 속도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태엽을 얻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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