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이른 봄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3.0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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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시골 아주버님댁은 외풍차단장치 하나 없이 허술하게 지어진 집이다. 그래서 노쇠한 형님내외분은 어렵사리 겨울을 나시곤 한다. 올 겨울 들어 제일 춥다는 날, 시골에 다녀온 남편은 비장한 얼굴로 복권을 사왔다.

넉넉지 않은 자신의 형편으로 형님을 도와드릴 방법은 그것밖엔 없다는 것이다. 복권이 당첨되면 형님이 사실 집을 다시 지어드릴 거란다. 두 노인이 거주하기에 불편하지 않게 따뜻하고 편안한 집을 지어드리고 싶단다. 전세금 대출이자로 허덕이는 딸의 전세대출금도 갚아주고 싶단다.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복권 당첨금은 여기저기 골고루도 나뉘었다.

그동안 마음이 쓰이면서도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남편은 행복해보였다.

“이번엔 당첨될 수도 있어. 당신 마음 씀이 예뻐서 하나님이 편들어 줄 수도 있어.”

나도 그런 남편을 은근히 부추겼다. 부추김이라기보다 나의 바람을 얹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일련의 가치도 없는 종이쪽지가 되기까지, 복권은 그렇게 찬란한 희망으로 우리 집에 머물렀다.

`1년 징역을 살고 10억을 벌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겠는가?'라는 설문에 절반이상의 대학생들이 그럴 수 있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죄의 종류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오직 10억이라는 돈에만 포커스를 맞춘 이 시대의 청년들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극심한 취업난과 폭등하는 집값 앞에 무력해진 청년들이 10억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돈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세상. 돈 때문에 부모형제 친구를 저버리고, 유일한 내 것인 목숨을 끊기도 하는 세상에서 10억이라는 커다란 돈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집 가까이 있는 재래시장에 손주들을 데리고 장을 보러갔었다. 맞벌이로 바쁜 딸 내외에게 닭이라도 고아 주려는 마음이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시장 안은 한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닭을 사고 나오는 길, 난전에서 팔고 있는 쌀튀밥강정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일에 치여 찌든 딸이 고거 하나면 배시시 웃을 것도 같아 얼른 두 봉지를 집어 들었다. 옥수수 튀밥을 봉지에 담고 있던 주인은 우리 손주들을 보고는 족히 한 봉지는 될 만큼의 튀밥을 덤으로 담아 주었다. “아가! 집에 가서 먹거라.” 찬바람에 새파래진 얼굴로 튀밥을 담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 노란 민들레가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는 듯했다. 물론 내 마음에도 노란 꽃송이가 보풀보풀 피어났다.

각박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있음에 주목할 수 있기를,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세상에서 웃는 날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기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인의 얼굴이 계속 꽃처럼 어른거렸다.

복권으로는 형님 집을 고쳐 드릴 수 없다고 판단한 남편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했다. 창문에 뽁뽁이도 붙이고, 커튼도 달아 드렸다. 그것만으로도 형님 내외분의 얼굴은 환하게 피었다.

곳곳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으니 올 봄은 유난히 빨리 찾아 올 것만 같은 훈훈한 예감이 드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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