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이야기
칼국수 이야기
  • 김일복 시인
  • 승인 2023.02.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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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김일복 시인
김일복 시인

 

K 교수의 고향인 경북 영해로 바다 여행을 떠났다. 이른 새벽 시인을 만나 우리는 4시간을 달려 영해에 도착했다. 영해 읍내에서 북동쪽으로 3km 지점에 있는 괴시2리 관어대 마을이다. 마을 뒤에는 상대산이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송천강이 흘러 동해로 유입된다. 관어대(觀魚臺) 마을은 집성촌으로 전부 한옥이었다. 관어대란 지명은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쓴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의 서문에 `관어대에 오르면 바위 아래 노는 물고기를 셀 수 있다'라고 한 데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툇마루에 앉아 햇살에 비친 영해 바다를 보았다. 출렁이는 파도와 푸른 바다는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 같은 거였다. 바다 건너 누굴 만나든 그리움은 멀리 보이는 섬 주위를 맴돌고 있으리라. 잠시 후 집성촌에 사는 K 교수 일가 형제들이 모여들었고, 늦은 점심은 가볍게 칼국수를 먹었다. 일가 형제들은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흥이 넘쳤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의 퇴근은 늘 술 냄새를 담아 오셨다. 아버지는 지친 듯 양팔을 벌리고 누워 어머니에게 칼국수를 끓여! 끓이라고! 큰소리를 내셨다. 아버지의 술 냄새가 담긴 양말을 큰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벗겼다. 어머니도 아무렇지 않은 듯 밀가루 반죽을 하셨다. 지금이야 편의점에 가면 썰어놓은 게 있지만, 당시에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밀가루를 뿌려가며 긴 홍두깨로 밀어 만들어주셨다.

칼칼한 국물 냄새가 진동할 때쯤 아버지는 코를 골며 주무셨다. 오늘도 어머니는 정성껏 만든 칼국수를 안방으로 들고 오시며 `챙겨서 먹어라' 한마디 하시고 나가신다. 술에 취해 한 말인데 매일 밀가루 반죽하는 엄마에게 큰형은 항상 화가 나듯 슬픈 얼굴이다. 그러니 둘째 형과 나는 눈치를 보며 먹기 싫어도 먹어야 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칼국수를 싫어했고 먹지 않았다. 이유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가 싫었다. 사실 밀가루의 주된 성분인 글루텐이 체질에 맞지 않는지 속이 더부룩해져서 먹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유난히 칼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비 오는 날이나 우울한 날이면 몸에서 반응이 온다. 쫄깃쫄깃하고 부들부들한 면발과 은은한 파 향을 더해 고명처럼 썰어 넣은 호박, 걸쭉하고 뽀얀 국물이 파도처럼 나에게 밀려왔다.

미워했던 아버지가 그리워진 것은 이때부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식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어머니는 한마디 말없이 매일 끓여주신 걸까? 배고픔만큼 간절히 그리운 맛, 육수를 내지 않았고, 바지락도 없었다. 뭔지 모르지만 `맛이란 이런 맛이지' 하는 맛은 이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다. 내 첫 기억은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첫 기억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는다. 어머니는 움츠린 채 아궁이에 왕겨를 뿌려가며 풍로를 돌리셨다. 매운 눈물을 닦아가며 솥단지에 칼국수를 끓여 내셨다. 부엌 안에는 뿌연 온기가 가득했다. 어머니의 마음은 부뚜막처럼 늘 따뜻했다. 부뚜막이 생각날 때면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다. 그래서 배고픔의 맛은 머리로부터 지워지지 않는다.

칼국수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쫄깃한 면발과 뜨거운 국물로 위로를 건네는 음식이다. 비 오는 날 칼국수 한 그릇을 비우면 땀이 쭉 나면서 개운해지고 도파민 분비가 활성화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당장 부자가 된 듯 행복하다. 배고픔을 아는 사람만 안다. 칼국수 맛은 조금 남긴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다 먹고 꺼~억 소리를 내야 알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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