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닿을 죄 만대를 기억하라
하늘에 닿을 죄 만대를 기억하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1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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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 승 환 <충북민예총 고문>

1968년 겨울이었다. 하얀 얼굴의 외할아버지가 수염에 묻은 하얀 막걸리를 훔치고 계셨다. 무엇인가 깊은 정적이 짓눌렀다. 무엇일까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나는 심상치 않은 그 분위기에 역시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빙빙 마당을 돌았다. 과연 이 음산하고 처절한 이 비극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 무거운 슬픔을 피해서 전봇대의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하얀 눈덩이를 던지면서 전쟁놀이를 했다. 저녁자리 역시 싸늘했다. 절망이 넘실대는 것 같았다. 나직한 소리로 "순영이가---"라는 신음이 들렸다. 이런 말을 하던 아버지 역시 얼굴이 하얗기는 마찬가지였다. 순영이. 그 이름은 마음씨 좋던 외삼촌의 이름이었다. 월남에 간다고 자신 있는 웃음을 보이던 외삼촌이 죽었다는 것이다. 힘이 좋던 외삼촌이 죽다니, 나는 고작 이런 정도만 생각하는 중학생이었다. 이렇게 외삼촌은 시체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전보로 죽어버렸다.

2007년 9월 4일, 푸엔성의 베트남민족해방기념비 앞에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베트남 푸옌성의 1400명 이름이 새겨진 그곳에서 총에 맞아 신음하면서 죽어갔을 외삼촌을 떠올렸다. 당시 우리는 천하에 불한당이 베트콩이며, 호지명은 히틀러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불한당과 히틀러에 대항하여 외삼촌이 싸운 곳은 이곳 남부베트남, 즉 월남의 어느 곳이었을 것이다. 순간 앞에 서 있던 베트남 아저씨가 보였다. 지금 저 베트남인의 아버지가 우리 외삼촌을 죽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저쪽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베트남은 통일 이후, 많은 한국군 증오비를 세웠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하늘에 닿을 죄 만대를 기억하라'. 그 하늘에 닿을 죄가 무엇인가. 잔인성일 것이다. 전쟁 중에 죽은 경우에는 존경을 담아서 기념을 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무슨 원한이 사무쳤는지 비석에 저주가 담긴 그런 문구를 새겨 넣었다는 설명을 듣고서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런데도 한국사람들은 베트남사람들이 과거에 대하여 관대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한류의 한국 드라마가 베트남을 휩쓴다고 감격한다. 착각과 망상의 끝이 없다. 베트남 사람들이 과거에 관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지혜롭게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 비석의 문구에 따른다면, 내 외삼촌의 죄가 하늘에 닿아 있는 셈이고, 그 죄는 만대에 걸쳐서 기억된다는 뜻이다. 나는 외삼촌이 잔인한 학살이나 비인도적인 만행(蠻行)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군 역시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전 당시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참전했다고 믿는 참전용사들에게 잘못이 있었으니 사과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상황 논리상 맞지 않는 발언이다. 모든 사건이 그렇듯 베트남전 역시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논리와 과거의 기억과는 별개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군에 대한 증오심이 이렇듯 심각한 상흔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베트남인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미래가 현재와 과거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에서 베트남 여성을 학대하여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베트남에 대한 학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문제는 그에 따르는 형식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베트남 여성을 돈으로 매매하다시피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베트남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심각하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충북민예총은 베트남인들의 그 나쁜 기억을 지우고 평화와 상생의 기억을 만들며 양국의 예술을 학습하자는 뜻으로 학교를 하나 건설했다. 그것이 제2호아빈 평화학교다. 충북민예총 예술가들 앞에서 제2호아빈 평화학교 교장은 한국인에 대한 증오가 화해로 바뀌었다면서 너털웃음을 웃었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하늘에 계신 외삼촌의 명복도 함께 빌었다. 부디 과거의 원한을 서로 잊고, 협력과 상생의 아름다운 기억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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