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추억 `길선당'
잃어버린 추억 `길선당'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02.2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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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나의 20대는 가난했고, 고달팠다. 그 시절 대부분 소녀들은 대학을 진학할 수가 없었다. 집집마다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개 집안의 장남들이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지금은 출산율의 절벽으로 인구증가에 대한 정책이 매년 뉴스를 장식하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산아 제한 정책을 펼쳤던 때였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지르자.'라는 표어가 온 나라를 장식했던 시대였다. 음성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한 교실에서 60명도 넘었던 학생들이 공부했다. `콩나물시루' 교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많았지만 모든 자식들을 지속적으로 공부를 시킬 여력이 그 시절 부모들에게는 없었다.

우리 집도 언니는 초등학교만을 나오고 공장으로 나갔고, 작은 오빠도 중학교를 끝으로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다. 4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충주에 있는 여자상고로 진학했다. 하지만, 사립학교였던 탓에 등록금을 낼 수 없어 중도에 산업체 학교로 전학해야만 했다. 동네에서 어쩌면 제일 가난했을 집이었는데도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지 싶다. 여학생들은 일반학교보다는 상고를 선호했는데 아무래도 취업이 빨랐던 이유일 것이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 오빠는 청주의 4년제 국립대학교를 들어갔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여 만에 고향인 음성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갑갑하기도 하고 복잡한 서울 생활이 적응이 쉽지 않았다. 집으로 내려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읍내에 있는 곳에서 경리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음성에서는 제법 큰 회사였다. 음성 가섭산에 채석장을 둔 청원 물산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파낸 돌은 단단하고 돌에 새겨진 무늬가 아름다워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했던 석재회사였다. 하지만 돌을 채석했던 가섭산이 훼손이 심각하자 주민들의 민원으로 1990년대 말 더는 채석을 할 수 없어 청원물산도 문을 닫게 되었다.

청원물산을 다닌 것은 2년이 조금 못 된다. 그때 점심은 제공되지 않아 각자 해결을 해야만 했다. 한 푼이 아쉬웠던 그때 내가 주로 이용했던 식당은 직장과 10분 거리의 시장통에 있었다. 물론 청원 물산의 주위에는 식당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청원물산은 2층이었는데 바로 아래층에는 찌개류를 팔던 한식집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격이 저렴했던 시장통의 분식집을 주로 이용했다. 그 집은 만두, 우동, 쫄면, 라면 등을 팔았다. 주로 라면을 먹었는데 그 집에서 제일 값이 싸기도 했거니와 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길선당은 연세가 지긋했던 부부가 운영했던 분식집이었다. 정도 많고, 인상도 좋았던 두 분은 내가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해서 그런지 딸처럼 대해 주셨다. 라면은 제일 저렴한 그냥 라면이었기에 계란이나 떡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야채를 푸짐하게 넣어주셨다. 이상하게 밖에서 먹는 밥은 금방 소화가 돼 헛헛했지만 `길선당' 라면은 야채가 많아선지 배가 든든해지곤 했다.

당시 내 월급은 7만원을 조금 넘었다. 월급을 타면 엄마에게 5만원을 주고 2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하지만 내가 번 돈은 오빠가 결혼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속상한 마음은 있었지만 부모님의 뜻이었으니 투정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허기지고 주리기만 했던 그 시절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모든 것이 풍족하고 여유로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때가 그리운 건 왜일까?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형제간의 우애와, 이웃 간의 온정은 고된 세상살이의 버팀목이 되곤 했다. `길선당', 아직도 이렇게 그 집이 그리운 건 아마도 허기진 내 젊은 날을 든든하게 해 주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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