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사람이다
봄이 사람이다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3.02.1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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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가끔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때의 기분을 외워둔다. 언제부터인가 되나 가나 막 사진을 찍지 않는다. 대신 그 꽃의 쨍한 색깔, 초록초록 발광하는 산 등허리, 오늘처럼 입춘지나 비가 내리는 아침 축축하지만 들뜬 기분이 들도록 하는 뺨에 닿는 감촉을 외워둔다. 외우고 싶은 순간 충분히 시간을 들여 그 느낌을 몸에 붙이려 애쓴다. 그래야 그 감격 속에 오래 머물면서 즐길 수 있고 감정의 즐김은 언제나 생의 가지에 맑고 선명한 비비드 톤의 무언가를 맺도록 하기 때문이다.

큰아빠께서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니, 갑작스럽다 모든 죽음은. 아무리 준비를 하고 있어도 죽음이라는 커다란 운명 앞에서는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명료한 정신으로 죽음을 맞이하셨다. 사그라드는 모습을 지켜본 가족의 말로는 몸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정신이 깨어있을 때마다 농담을 하셨단다. 큰아빠답다. 한때 언제나 유쾌하고 자상하신, 그 따뜻한 마음에 반해 그의 딸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는 자녀와 조카를 똑같이 사랑하셨다. 그런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른이 돼서야 알았다. 상투적으로 들리던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뵐걸' 하는 말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설을 코앞에 둔 춥던 어느 날, 서둘러 떠나신 큰아빠를 뵈러 가는 동안 아직 실체를 보지 않아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입관실에 도착했다. 긴가민가하던 소식이 사실이 되어 현실로 나를 덮쳤다.

설 밑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조문했다. 그의 인기는 죽었어도 여전한 듯했다. 그리고 십수 년 만에 사촌들을 만났다. 시간을 넘어 한자리에 모인 같은 성을 갖거나 피를 나눈 사촌이 전하지 못했던 시간을 메우느라 장례식장은 잔칫집처럼 떠들썩해졌다. 슬픔으로 쏟아내는 눈물보다 만남과 안부의 소란함이 마치 큰아빠가 마지막으로 그린 빅피쳐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그림을 원하셨구나!'

인류학에 따르면 인간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 죽음을 직감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 심판은 사후에 내려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영혼의 참 행복을 위해 인생을 끊임없는 선의 추구로 인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할 때 죽음은 당사자뿐 아니라 지켜보는 이에게도 많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큰아빠의 죽음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닮았다. 이들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고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건사하고 자신의 자녀까지 힘껏 키워낸 존재, 조르바의 마지막처럼 저 위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죽음을 서서 맞이한 사람. 조카가 지은 첫 책을 성경책과 나란히 머리맡에 두고 주무셨다는 큰아빠의 정성과 사랑이 그립다. 의연하게 맞이한 죽음과 함께 안식의 세계로 환승 한 큰아빠의 영혼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모서리 같은 인생이었지만 당신이 계셨기에 제가 둥글게 살았습니다.”

할머니 산소 곁에 유골함을 묻고 표지석을 세웠다. `큰아빠 옆자리는 아빠 자리에요'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아빤 화를 내지 않고 좋아하시는 눈치에 가슴이 아프다. 죽음은 매우 인간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이제 봄은 계절이 아니라 사람으로 다가온다. 큰아빠의 심장이 멈춘 모습, 핏줄로 묶인 이들의 소란한 목소리들, 하얀 유골 위에 부는 찬바람, 산에서 바라본 하늘색이 봄이 되어 오고 있다. 큰아빠가 돌아가시고 봄이 온다. 큰아빠가 봄으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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