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그 가능성에 대하여
엽편소설, 그 가능성에 대하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1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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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서점에 가면 질리기에 충분한 양의 소설이 있다. 만약 독자가 읽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해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읽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소설은 많아도 읽히는 소설은 많지 않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독자들의 변화된 독서 성향도 그 하나이다. 즉 소설을 읽는데 오랜 시간을 쓰려고 하지 않는 독서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소설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든 문학 텍스트는 독자가 읽어줄 때에 진정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으로 탄생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의 독서 과정이 텍스트를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뒷자리를 지키고 있던 독자들의 목소리가 전면에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독자들의 적극적인 수용 자세에서 소설이 다양한 양식의 글쓰기를 시도해야 할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 등장한 엽편소설(葉片小說)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소설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엽편소설은 나뭇잎 하나에 그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짧은 소설을 지칭한다. 예전의 용어를 빌리자면 장편소설(掌篇小說)과도 유사한 소설이다. 미국에서는 그 출현 자체가 예기치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Sudden Fiction'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의 단편에 비해 20매 미만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초단편소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러한 명명은 장편소설(掌篇小說)은 장르로서의 특성을 잃었다는 뜻일 것이다. 엽편소설이 작품의 간결함이라는 측면에서는 장편소설(掌篇小說)과 유사하지만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며, 분명한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구분된다.

이런 엽편소설을 대하는 우리 문학계의 인식은 부정적인 편이다. 하와이대학의 로버트 셰퍼드(Robert Shapard)와 유타대학의 제임스 토마스(James Tho-mas)가 1989년에 펴낸 '세계의 급작스러운 소설'이라는 책의 서문은 그러한 실정을 잘 말해 준다. 즉 편자가 보낸 20매 안팎의 짧은 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우리 나라에 추천서를 보냈는데, 서울의 편집자는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짧은 소설들을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들은 호흡이 길다"라는 회신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중국은 같은 추천서를 받고 그렇게 짧은 소설이 아주 대중적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니 우리 측의 답변은 아무래도 무책임해 보인다. 우리 나라에도 엽편소설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아울러 문학적 위상마저 높여야 할 어려운 시점에 놓여 있다. 이러한 때에 독자들이 앉은 자리에서 짧게는 1분, 길게는 10분 정도면 한 편의 소설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엽편소설. 그것은 확실히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설은 독자에게 읽혀질 때에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엽편소설이야말로 독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글쓰기 방식인 셈이다. 나아가 장르의 파괴라는 틀 속에서 시와 소설의 경계마저도 불분명해지고 있는 최근의 문학적 경향을 생각한다면 엽편소설의 장르적 가치는 긍정적인 재고가 필요한 실정이다. 최성각의 '택시 드라이버'(세계사, 1996)는 이러한 주목에 값하며 그의 창작 의욕마저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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