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 전설이 깃든 보은 호점산성
최영 장군 전설이 깃든 보은 호점산성
  • 정춘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
  • 승인 2023.02.0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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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문화유산의 이야기
정춘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
정춘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

 

보은 회인면 용곡리의 험준한 산속에는 보은지역 최대규모의 산성으로 알려진 호점산성이 수려한 대청호의 경관을 내려보고 있다.

호점산성은 조선 전기의 관찬사료인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위치와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사찬사료인 『연려실기술』에도 보이는 만큼 옛사람들은 이 산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산성은 왜 호점산성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주변에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호점산성이 위치한 산 봉우리에 영험한 호랑이가 살았다 하여 호점산성(虎岾山城)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 호점산성은 언제, 왜 쌓아졌을까? 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내용을 사료에서 찾기는 힘들다. 그런데 호점산성 주변에는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 장군이 이 산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이 호점산성에 왜 최영 장군의 전설이 깃들게 되었을까? 이는 고려 말기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과 이를 최영 장군이 격파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 왜구는 약탈을 목적으로 고려의 연안부터 침입하기 시작하였으며, 공민왕 때에는 논산-옥천-보은 등 내륙에까지 침입하기에 이른다. 이에 최영은 삼남지역에 창궐한 왜구를 격파하여 오랜 기간 왜구에 시달렸던 삼남지역 백성들의 신망도 얻었는 바,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최영이 양광(지금의 충청)·전라·경상 도통사가 되었을 때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의 성터를 수리할 때 이 호점산성 또한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이외 호점산성과 관련된 전설 가운데는 호점산성 안 7곳의 골짜기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남대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적을 막았다 하여 `막은골', 그 아래 갈발골은 성내에 피신해 있던 백성들이 궁지에 몰리자 갈대밭에 숨어있다가 나간 골짜기이라해서 `갈발골', 성문이 막혀 갈곳은 이곳 뿐이라며 골짜기로 몰려간 곳이 `가는골', 문안골은 성문 안의 첫 골짜기이라 해서 `문안골', 성문 밖 `성식골'은 성안에서 패한 장수가 이곳에 나와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옷을 바꿔입고 성까지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 장수는 다음 골짜기에서 잡히고 말았는데 그 골짜기가 `잽이골'이라 하고, 성이 함락되자 군병들이 놋그릇을 샘에 묻고 도망갔다 하여 `놋샘골'이라 한다.

호점산성은 문의-회인-보은-경상도로 이어지는 금강 수로교통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입지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축조방법에서 특색이 있는데, 석축 부분 중 벽면에 일정한 간격의 기둥 홈이 나타난다. 이 기둥 홈은 성벽을 빠르게 쌓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석축을 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호점산성의 축조기법에서 나타난 특징인 기둥 홈이 나타나는 석축산성의 분포가 강원·충청 지역 등 일정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분포하는 것을 근거로 중세 이후 나말여초기에 지방호족세력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 호점산성에 대한 보은군민의 관심은 실로 대단하여 보은 회인면 이장협의회 주최하에 호점산성을 널리 알리고 등산로 개발을 기념하고자 호점산성 등반대회를 2003년부터 약 10년간 개최한 바 있다. 다만 이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산성의 기초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이에 보은군에서는 올해부터 보은 호점산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 도출을 위해, 그리고 지정 및 정비를 위한 학술적인 논의에 필요한 위한 기초자료를 마련하고자 학술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향후 학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호점산성의 활용방안을 모색하여, 보은 삼년산성과 더불어 보은군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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