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복판
겨울 한복판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3.01.3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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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계절도 하나의 산이다. 깔딱 고개 가파른 길을 걷다 보면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일단 고개의 정상에 이르고 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 고속도로이다. 내리막길은 너무 빨라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겨울 고개는 넘기 힘들지만 일단 그 꼭대기인 대한(大寒)에 이르고 나면 그다음은 지긋지긋했던 그 세월도 그리워질 판이다.

송(宋)의 시인 소옹(邵雍)은 대한(大寒) 절기가 단순히 춥고 견디기 어려운 날이 아니고 나름의 정취를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대한 절기를 맞이하여(大寒吟)

舊雪未及消 (구설미급소) 묵은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
新雪又擁戶 (신설우옹호) 새로 온 눈이 다시 사립문을 막아버렸네
階前凍銀床 (계전동은상) 섬돌 앞에는 얼어붙은 은빛 평상이 있고
檐頭冰鍾乳 (첨두빙종유) 처마 끝에는 얼음 종유석이 매달렸네
清日無光輝 (청일무광휘) 맑은 해도 빛이 없고
烈風正號怒 (열풍정호노) 매서운 바람이 마침 성난 듯 불고 있네
人口各有舌 (인구각유설) 사람 입마다 각각 혀가 있지만
言語不能吐 (언어불능토) 말을 내뱉지 못하네

24절기 중 마지막이 바로 대한(大寒)이다. 그다음 절기가 입춘(立春)인 것을 보면 대한이 겨울의 끝인 셈이다. 소한(小寒)의 얼음이 대한 때 녹는다는 말이 있듯이 절기로만 보면 추위가 가실 법도 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큰 추위일 때도 있는 것이다.

시인이 맞은 대한도 명실상부한 대한이었던 듯하다. 절기 이름에 맞게 추위가 극에 달한 날의 정취가 구마다 잘 나타나 있다. 진작 내린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그 위로 눈이 또 내려 쌓인다. 그래서 사립문이 눈에 막혀 열리지가 않는다. 그만큼 춥다는 것이다.

섬돌 앞 평상도 꽁꽁 얼어서 은빛으로 된 것도, 처마 끝에 종유석 같은 고드름이 달린 것도 큰 추위가 만들어 낸 풍광이다. 맑은 날인데도 해가 그리 빛나 보이지 않는다거나 같은 바람인데도 성질 사납게 느껴지는 것도 다 추위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말을 해 놓고도 성에 안 찼던지 시인은 마지막으로 사람 입을 가지고 추위를 묘사한다. 사람 입마다 혀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마저 다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추위임을 말하는 시인의 말솜씨가 참으로 절묘하다.

절기상으로는 분명히 겨울이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동장군이 절기를 봐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얼만 안 있으면 사라질 추위인 만큼 그것이 연출해 내는 풍광에도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면 막바지 추위를 버티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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