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날 - 청송
취한 날 - 청송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3.01.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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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장 지질 듯 뜨끈한데 불현듯 얼굴을 찬 공기가 어루만진다. 서둘러 가슴팍 밑으로 밀친 하얀 솜이불을 끌어다 얼굴을 묻는다. 얼굴을 스치며 오르는 소창이 보드랍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았다. 이불 속 공기가 답답하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자정을 넘긴 술에 엔간히 취했는지 이젠 상기된 볼에 찬 기운이 제법 시리다. 펑퍼짐하고 벌건 얼굴에 찬 공기가 지나며 안개든 뭐든 만들어질 듯도 한데 연이어 드는 서느런 바람이 밀어낸다. 상쾌한 공기가 문지방을 넘어 코끝을 휘감아 돌아 나간다.

연이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는다. 한겨울에 웬 물방울 소리? 격자 미닫이문이 열린 채 여닫이문이 문설주와 각을 벌린다. 정신 차려 밖을 보라 심술이다. 문고리가 `덜컹' 물방울 소리를 따른다. 처마 밑으로 물방울이 연달아 떨어진다. 밤은 깊고 물방울 소리는 청아하다. 그도 잠시 본능적으로 미닫이문은 그대로 둔 채 여닫이 문고리만 간신히 잡아당긴다. 끼익 소리와 함께 손도 얼굴도 이불 속으로 숨는다. 물방울 소리는 나지막하고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정신이 들어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동이 튼 뒤였다. 이불 밖으로 쭈뼛 나온 귀는 몇 시간 전에 들었던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아직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큰 음량에서 점점 작아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일정한 간격은 아니다. 아직 상기된 볼에 정신은 온전치 않은데, 소리를 따라 문을 조심스레 연다. `끼익!' `덜컹!' 멀리 산을 배경으로 낙숫물이 떨어지고 있다.

뚝! 뚝! 뚝뚝뚝! 처마 끝에서 순서대로 낙하다. 떨어지는 순서는 랜덤이다. 낙숫물의 청량함이 결국 툇마루로 불러낸다. 맨발이다. 시릴 것 같았는데, 웬걸! 상쾌하다. 소나무로 된 툇마루가 제법 시원하다. 툇마루의 맨 끝에 앉자마자 기둥에 몸을 기댄다. 등짝에 딱 맞는 기둥이다. 몸을 맡기고 고개를 든다. 수많은 낙숫물이 땅을 두드린다. 소리를 따라 눈이 따른다. 소리가 먼저인지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먼저인지, 동그랗게 퍼지는 물결이 먼저인지 분간이 안 간다. 분명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툇마루 앞마당은 온전하게 비어 있다. 겨울비는 거친 마사토가 깔린 마당을 연신 두드린다.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낙숫물이 주르륵 흐를 때도 빗방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65개의 암키와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소리죽인 관중이 된 듯하다. 악보는 없지만 느리게 빠르게, 강약을 조절해 연신 물 고임 자리를 두드린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물결이 서로 인사를 건넨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암키와와 마사토가 만들어내는 연주는 완전히 넋을 빼앗았다. 엉덩이와 발이 시려 감각이 둔해질 즈음 나간 넋이 돌아왔다. 한참이 걸렸다. 기둥에 쩍 달라붙은 등을 떼어 곧추세우고 담장 너머로 눈을 건넨다. 담장 너머 먼 산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낙숫물 소리가 잦아들더니 이젠 무희가 등장한다. 너른 마당, 비어 있는 마당을 건너 자리하고 있는 산이 무대가 되어 물안개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대의 배경은 상고머리를 한 가파른 산이다. 이발소에서 윗머리를 일정하게 깎아놓은 듯한 소나무가 산의 능선을 따라 가지런하게 늘어섰다. 물안개의 춤사위가 구름 흐르듯 흐르고 모여 군무가 되며 나무가 숨어들고 산이 숨는다. 그러잖아도 술에서 덜 깼는데 물안개가 넋을 빼앗아 간다.

낙숫물이 갑자기 가슴을 두드린다. 가슴이 먹먹하다. 하늘이 숨을 쉬니 물이 되었다. 물이 하늘과 이별을 고하니 비가 되고, 기와에 닿아 낙숫물이 되어 땅을 두드린다. 물방울이 튀며 물과 땅이 숨을 쉰다. 하늘의 숨에 나무가 숨을 쉬고, 숲이 숨을 쉰다. 덩달아 하늘의 구름도 숨을 쉰다. 기와에 앉는 빗방울은 소리가 없다. 낙숫물에 소리를 양보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기와엔 이끼가 끼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와송이 삐쭉삐죽 곧추세울 것이다. 여전히 소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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