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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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3.01.1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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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마음이 복잡한 듯 오묘해지고 지리멸렬한 듯 그럼에도 환기가 필요한 세모(歲暮)에 어울리는 작품을 책장에서 골랐다. 이제는 고전이 된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중 `향연'에는 인간의 모습이 처음에는 둥근 공 모양이었다고 한다. 팔과 다리가 네 개, 목하나 위로 얼굴이 두 개가 있고 귀가 네 개, 엉덩이가 두 개였다고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다. 성(性)도 세 개였다고 한다. 서서 걷기도 하고 빨리 구르기도 했던 인간은 교만과 탐욕, 싸움 등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 갈라지게 되었다. 이제 반으로 갈라지게 된 인간은 서로의 반쪽을 찾는 게 숙명이 되고 잘린 배 쪽을 바라보며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새를 상상하며 순간 부족한 나의 한쪽을 찾는 것이 신의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결핍'은 인간으로 명명되는 순간부터 따라오는 화두(話頭)였는지도 모르겠다. 결핍이 주는 삶의 에너지는 짝을, 혹은 운명을 찾아 떠나는 여정 위에 새로운 관계 맺음의 동기부여가 되어 더 높은 차원의 성숙으로 이끈다. 잃어버린 한 조각이 채워진 후에야 결핍으로 인한 소박했던 기쁨이 새삼 감사였음을 깨닫는 순간은 생의 아이러니다.

한쪽을 찾아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었다가 다시 그 한 조각을 버리는 결심에 경의를 표한다. 자칫 '완전해졌다 `라는 것에 취해 그 삶이 주는 안락함 속에 머물러 있을법한데도 동그라미는 과감하게 다시 이 빠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퇴행으로 보이나 혼의 진보를 이루고 그것을 삶으로 옮긴 영혼의 탁월함이다.

`길 위의 철학자'라고 불린 `에릭호퍼'가 있다. 그는 일거리 중에 가장 밑바닥 인생들이 경험한다는 험한 일을 전전하는 떠돌이다. 삯을 쫓아다니는 군상들의 갖가지 사건을 내면화하며 길에서 읽고 쓴 그는 참다운 관계를 찾아가는 길 위의 존재자다. 약병에 수산염 알갱이를 채워 죽기 위해 쏘다니던 그가 어느 날 자살에 대한 반항으로 죽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에 들어섰던 날, 불행한 유년시절의 고통으로 얼룩진 상처는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박노해의 말처럼 다른 길이 그를 향해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이 빠진 동그라미가 한쪽을 채워 완벽해졌다가 다시 결핍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고통으로 죽는 것이 가장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한 부랑자가 길 위에서의 회심으로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기에 좋은 시간이 지금이다. 시간에 갇힌 우리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금세 사라지며 곧 나타남의 순간이 시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이다. 우리는 그래서 시간이 감에 따라 변화하게 되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죽음으로 이끄는 절대적 존재가 시간이다.

반복되는 것 같지만, 어제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분명 `오늘'은 다르다. 결핍에 도전하고 극복하기 위한 힘에의 의지를 쏟아내도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간'이라는 수레바퀴 안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없지만 내 몸에 새겨지는 시간 앞에 `그래 봐야 작년과 비슷하게 살겠지!' 하는 한숨과 함께 실낱같은 희망 한 줌으로 반짝이는 실타래를 보기도 한다. 한쪽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옆에 끌어다 앉히는 것이다. 올해도 결핍과 부족함 속에 자신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생의 한 마디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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