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방 할매
점방 할매
  •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3.01.1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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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오메, 오메 오메 어쩌스까”9층병동 다인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입원실의 아침을 연다.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시면서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을 체크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인 할머니와 난 한 병실에서 골절 치료로 동거 중이다. 갖가지의 사연으로 입원한 환우들, 오로지 수술과 치유를 위해 여러 명이 한방을 사용하고 있을 뿐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병실이다.

전라도 할머닌 손위 언니한테 머리염색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목 낙상으로 한쪽 팔 골절로 수술을 받으셨다. 엎치데 덮친 격으로 전날 염색 부작용으로 옻이 올라 머리부터 얼굴까지 퉁퉁 붓고 가려움에 몸살을 앓고 계신다.

병실에서 가장 연장자이신 할머닌 홀로 작은 매점을 운영하고 계시지만 현시대에서 과거로 뒷걸음 친 듯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할머니이시다. 지금에야 백화점, 대형마트, 슈퍼로 진화된 매장이 즐비하지만 할머니 가게는 젊은 시절부터 동네가게로 시작한 만물상 매점이다. 세월에 떠밀려 조그마한 가게로 변모되어 그야말로 구멍가게로 그 옛날 점방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할머니의 점방 경영철학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형할인매점과 24시 편의점 그리고 무인점포가 24시간 뱅뱅 돌아가는 시대이건만 할머닌 아침 6시에 오픈해 오전 9시면 점포 문을 닫는다. 브레이크타임처럼 또 오후 4시에 오픈하여 밤 9시면 마감이다.

온종일 영업해도 시원찮을 텐데 할머니의 경영방침은 완고했다. 제아무리 급한 고객이 문을 두드려도 실내에 계시면서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가면서 단골손님에게 영업시간이 각인되어 손님들 스스로 시간을 맞춰 물건을 구매하러 오신단다. 때문에 할머닌 영업시간 외 자신만의 의한 시간을 뚝 떼어 자유롭게 여가선용을 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계셨다.

할머니의 검은 머리가 은빛으로 물들어 가면서 덩달아 점방나이도 한 살 한 살 더해졌다. 반질반질한 손잡이와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계산대, 책상과 물건들 그리고 진열대는 할머니처럼 노후가 되어 빛바랜 채 동행하고 있었다. lT시대 바코드로 스캔하여 계산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자계산도 아니고 오로지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온 손때 묻은 손 계산기가 전무다. 인정 많은 할머닌 단골손님들에겐 언제나 덤으로 사탕 한 줌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손버릇이 나쁜 아이들에겐 외할머니 마음으로 모르는 척 더 친절하게 대하다 보면 어느 날부터 스스로 손버릇을 고친다고 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가 고집스럽게 점방을 운영하는 것은 단 하가지 이유다. 말이 고프고 사람이 그리워서이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매장을 두고 시간을 되돌려놓은 듯한 도심 한구석 할머니의 점방, 노포를 찾는 단골고객 또한 할머니와 똑같은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까. 고향 같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함 때문에 이것저것 마다하지 않고 찾는 것이다. 행여나 문이 닫히는 날이면 서로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염려해 준다. 상품가격이 중요치 않다 오며 가며 정이 들고 사람 냄새 나는 이곳, 점방만의 특유의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물과 불을 가릴 줄 알고, 이해와 관용의 폭이 넓어지고 배려와 사랑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굽이굽이 살아온 할머니의 삶의 흔적들, 잔잔한 호수에 돌팔매로 파문이 일던 일 그리고 시원스레 철썩거리던 파도가 태풍이 휘몰아치면서 성을 내는 것처럼, 고단한 삶의 여정을 풀어 놀 때면 우린 턱 괴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통증도 잠시 잊었다.

할머니에겐 농익은 사람의 향기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황금, 소금 그리고 지금'이라는데 비록 몸을 병원에 맡긴 신세이지만 이 순간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병실, 창문에 어둑살이 사붓사붓 내려앉는다. 내일 아침이면 옻 때문에 퉁퉁 부어 있는 할머니 얼굴이 가라앉기를 기대하면서 할머니와 노을을 번갈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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