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꽃
솜꽃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3.01.1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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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밤새 내린 눈이 하얀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아침에 나가보니 자동차도 나무도 모두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밤을 보냈다. 찬바람이 불자 옷깃을 여미고 사무실 앞을 지나던 이들이 솜꽃을 바라보며 한참씩 눈길을 준다. 머리에 인 함박눈 덕분에 더 풍성한 꽃을 피운 화분에 절로 시선이 가는 모양이다. 비어 있는 다른 화분들 사이에 혼자 꽃 피워 이 겨울을 지키고 있는 목화 화분이다.

지난봄이었다. 이웃이 목화 모종 서너 포기를 주고 갔다. 요즘 보기 드문 꽃이라 내심 반가웠다. 넉넉한 화분을 골라 상토와 퇴비, 흙을 적당히 섞어 정성껏 심었다. 볕이 잘 드는 사무실 처마 밑에 다른 화분들과 나란히 두었다.

때가 되자 화분마다 봄꽃이 쉼 없이 피어나고 그 화려함에 벌 나비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달이 넘도록 피고 지기를 거듭하던 꽃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그러나 목화는 줄기와 잎만 키울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름이 되어서야 한두 송이 옥색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꽃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화려함의 꽃이라면, 수수하고 소박한 목화꽃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이었다. 사무실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허리 굽혀 바라보며 그 고요한 매력에 빠지고는 했다.

은은한 옥색 꽃이 붉게 변한 뒤 진 자리에 조그마한 다래가 맺혔다. 복숭아 모양을 닮은 다래는 서리가 오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사방으로 갈라지더니 눈송이 같은 탐스러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현대인의 복잡한 삶에 위로가 되는 조용한 꽃으로 한번, 가을에는 인간의 삶에 이로운 꽃으로 또 한 번, 그 작은 모종에서 피운 두 번의 꽃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생명들은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계절이 따로 있다. 목화가 오랜 기다림 끝에 꽃을 피우듯 나의 삶에도 긴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 공부를 해보겠다고 용기를 내었던 그때를 돌아본다.

청춘이 저만치 물러간 40대 초반에 늦깎이로 공부를 시작했다. 어찌나 좋던지 잠을 자지 않아도, 밥을 먹지 않아도 신이 났다. 배움에 대한 오랜 목마름을 채우던 시간이었다.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방송통신대 교육학과 학생이 되었다. 입학식 때 만난 학생들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자기의 삶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느라 원했던 공부를 늦게 시작한 이들이었다. 나이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동급생이라는 공통분모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서로를 응원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젊은이들보다 뜨거운 열정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나는 취업을 했고, 가정주부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해력과 판단력이 남보다 조금 늦었다. 반면 성실함과 책임감은 직속상관이 인정해 주었다. 일선에서 고생하는 직원에게 주어지는 포상으로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하는 청와대로부터 초청을 받는 영광도 가졌다. 그렇게 16년간 공무를 수행하고 정년퇴직을 했다.

그동안 틈이 날 때마다 늘 공부를 해 왔다. 덕분에 유아숲지도사, 숲해설사, 유아곤충지도사,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해 산림교육전문가로 성장했다. 지금은 유아숲지도사로 근무하며 음성 지역의 어린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이 아이들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이로움을 주는 두 번째 꽃을 제대로 한번 피워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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