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된 삶
주인 된 삶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3.01.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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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불교의 가르침 중에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말이 있다. 불교 중에서도 선불교(禪佛敎)의 거장 임제 선사의 법문이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니, 발길 딛는 곳마다 모두 참이다.”라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주인 의식을 가지고 주인이 되거나 주인공이 되어 참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목전의 상황을 좌지우지하며, 주변인들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말인가? 아니면 언제 어디서나 주인의 입장에 타인을 손님처럼 존중하고 배려하며 봉사-희생하는 지고지순의 이타적 삶을 살아가란 뜻인가? 수처작주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다면, 입처개진은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입처개진은 수처작주에 따른 결과로, 수처작주만 되면 발 딛고 서는 모든 곳이 참되리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수처작주에서 주인(주인공)이 되라는 것은,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업식 속에 저장된 온갖 지식과 주견 등의 지배를 받는 노예 상태를 벗어난 순수 의식으로, 매 순간이 태초인 창조적 삶을 누리라는 것이지, 결코 타인의 위에 군림하면서, 타인을 하인처럼 부리는 주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매 순간 대 자유인이 돼서 발 딛는 곳의 처한 상황과 조화를 이루며 필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업식의 `나'가 일으키는 이런저런 습관적 생각들을 즉시 알아차리며 마음을 0점 조정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을 통해 크게 죽어 크게 거듭남으로써 과거의 습관에 물들지 않은 순수 의식, 즉 0점 조정된 마음을 회복할 때 비로소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수 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는 매 순간 스스로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라고 강조한다. 불교는 불교는 온갖 업식을 녹이고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달으라고 가르친다. 유교는 극기복례 즉,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독교 불교 유교 할 것 없니, 큰 욕심을 부리며 자기 자신 위주의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떳떳하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을 0점 조정함으로써 낡은 습관적 분별을 쉬고 또 쉼으로써 텅 빈 무심의 순수 의식을 회복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누리기 위함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 삶이란, 과거의 경험에 따른 기억 뭉치인 업식의 `나'가 일으키는 낡은 생각의 노예가 아니라, 0점 조정된 마음인 무아(無我)가 주인이 되어,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지혜로운 생각과 언행을 마음껏 펼치는 삶을 말한다. 어떠한 프레임에도 얽매이지 않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삶은, 자신의 주견을 텅 비워낸 뒤, 성령의 도구로 온전히 쓰이는 삶이며,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며 하되 함이 없이 물처럼 흘러가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및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의미한다.

수처작주를 일상의 표현으로 쉽게 정의한다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기 자신과 인연이 닿는 주변 사람들 및 처한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수처작주란 주인이나 주인공만 고집함도 없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연이나 보조 역할도 감사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겸허한 삶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까닭에 수처작주면 발 딛는 곳마다 참될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새해엔 이 글과 인연 닿은 모든 독자가 욕심 욕망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고, 과거의 그릇된 습관을 훌쩍 벗어나, 새 하늘 새 땅의 대 자유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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